[네모난 하늘]
네모난 하늘을 본 적이 있다. 사각형으로 아파트 네 개의 동이 세워진 가운데에 있는 주차장에서였다. 가끔 그랬던 것처럼 무심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네모반듯하게 그려진 사각형 안에 하늘이 갇혀있었다. 아니, 내가 그 아래에 있었다. 순간 깊은 우물 속에 빠진 듯 했다. 90년대에 한창 유행했던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책이나 노트, TV, 창문, 책상, 버스 등 끝없이 이어지는 가사를 들으며 주위에 네모 모양을 가진 것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당시에 내 눈에 보이는 네모를 통해 보는 세상은 꽤 멋지고 자유로웠다. 네모난 방안에 있는 많은 물건들은 익숙한 것들이었다. 책 속에는 꿈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었고, 노트는 얼마든지 글이나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는 앞집이나 뒷집이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 넓은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 하늘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포장된 길을 따라 10분정도 걷다보면 네모난 논과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학교 창문을 통해서는 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으니 더없이 운치가 있기도 했다. 필통이나 책상 등의 작은 네모들은 그 속에 꼭 있어야만 하는 부속품 같았다.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금 내 눈앞을 채우고 있는 하늘은 그다지 넓지도, 자유롭지도 않아 보였다. 한손을 펼쳐서 몇뼘이나 되나 재어보았다. 하나, 두울, 세엣...... 몇 뼘 되지 않는 작은 네모 속으로 세상이 밀려난 듯했다. 네모난 휴대폰, 컴퓨터, TV 등은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라며 우리를 유혹한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어서 하늘을 봐도 얼마가지 못해 막혀버린다. 도로는 늘어나고 사람들은 많아졌다. 어디를 가더라도 아스팔트로 대지를 덮어버려 더 이상 땅을 밟을 일이 없다. 거리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있는 나무들도 네모 속에 갇혀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90년대 후반에 나온 《맨인블랙》이라는 영화에는 사물함 속에 살고 있는 외계인 세상이 나온다. 친구가 주인공을 위로하기 위해 외계인들이 사는 장소를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들은 그곳이 자신의 별이라 여기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네모난 한 개의 사물함일 뿐이었다. 그곳에 주인공은 신이라도 된 듯, 손목에 있던 시계를 풀어 그들에게 내어준다. 외계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손목시계를 신성시하며 신처럼 떠받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진행되던 영화는 주인공이 나쁜 외계인을 물리치는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많은 사물함 속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마지막 장면이 당시에는 꽤 충격적이었다. 그때는 둥근 지구는 허상이고 이미 규격화 된 사물함 속에 내가 갇혀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속담이 있다. 우물에 갇힌 개구리들은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우물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은 쉽고 간단해 보인다. 어렵게 뭔가를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으니까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것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평화로운 우물 속에 외부에서 작은 돌만 던져도 그 파동으로 인해 몸을 보호하려고 방어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법도 머지않아 조금씩 터득한다.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면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얘기를 한다. 우리가 어릴적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어떤 개구리는 세상에 나가보고자 한다. 높은 우물을 한계단씩 내딛으며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것을 해내는 과정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 높은 곳을 오르다보면 손이 부르트며 피가 날지도 모른다. 배가 고파 뭔가를 먹고 싶어도 쉴 장소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올라가다가 더 이상 내디딜 길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럴때면 포기하던지 앞으로 나가던지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이는 안타까워하며 격려를 해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이 미련하다고 질책을 하며 포기를 종용하기도 한다. 그래봤자 소용없어 하며, 어떤 이는 잘난척을 하며 방법을 알려주지만 실제로 해보지 않은 자가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끝없는 갈등 속에서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며칠 전 재미있는 통신회사 광고를 보았다. 직원들이 몇천번, 몇만번을 똑같은 실험을 반복하는 테스트를 해서 나온 믿을만한 제품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들었던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루에 세시간씩 10년동안 1만시간을 하면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한번쯤은 들은 내용일 것이다. 박지성이나 김연아나 혹은 유명인이 된 사람들을 예로 들며 인터넷이나 책들에 담겨 유행을 탔던 얘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런 얘기들을 들어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특별한 방법을 찾는다. 과정 속에서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으면 답답해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던지는 한마디, 두마디는 점점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우물 속에 떨어진다. 그쯤되면 과정을 거치면서 알아가는 기쁨이라는 것은 점점 멀리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불과해진다. 말에 휘둘린다는 의미가 이런게 아닐까 싶다. 그 속에서도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은 존재한다. 그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또다시 한마디씩을 던진다. 하지만 언제나 양면은 존재하는 법이다. 결과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과정이었지만, 아직 그 과정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기나긴 시간일 뿐이다.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도 많다. 어떤 이들은 매번 핑계와 이유를 대며 중도에 돌아서면서도 뭔가를 해봤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점 잊어간다. 우물에 다가갈수록 넓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는 것을, 길을 가는 과정 속에서 즐겼던 기억들을 조금씩 밀어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며칠 전, 동기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직장에 대한 얘기를 했다. 평범한 중산층으로 사는 그들은 더 나은 직장을 구하고자 했다. 한 언니는 나이가 들수록 일자리를 찾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했다. 자식이 대학에 입학할 때가 되니 들어가는 비용이 많아져서 더욱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얘기가 바로 현실이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마음은 위축되고 뭔가를 해보려는 시도조차 힘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높은 건물들 안에 갇힌 하늘처럼 내 마음도 그렇게 막혀버린 듯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것은 옛날에나 해당되는 속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둘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연결하다보면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나는 길이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든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길, 막히는 곳이 있더라도 새롭게 이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길이다. 오늘은 문득 넓게 펼쳐진 하늘 아래서 누런 흙을 밟으며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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