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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인연    
글쓴이 : 배숙희    13-10-27 20:48    조회 : 5,581
[작은 인연]
 
강남에서 친구들과 만남을 가졌다.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길가에 어지럽게 버려진 광고지들이 보였다.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리에서 나눠주던 광고지들은 쓰레기가 되어 거리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 광고지를 보면서 문득 90년대 중반에 친구들과 자주 만났던 부산의 남포동 거리가 생각났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부산에서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부산대학교가 있는 대학가나 서면, 남포동이 그나마 번화한 장소였다. 특히 남포동은 한곳에 영화관들이 밀집되어 있어 영화를 보기 위해 자주 갔었다. 특별히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국제시장, 보수동 책방골목, 자갈치시장, 용두산 공원 등 갈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남포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이 종합선물세트처럼 꾸려진 장소였다. 우리는 많은 인파로 붐비는 국제시장 여기저기를 누비면서 싼 물건을 구입하거나 우리만의 아지트가 될 만한 맛집을 찾아내기도 했다. 많은 먹을거리들이 널려 있었고 가격이 저렴해서 학생인 우리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을 돌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했다. 용두산 공원으로 향하는 큰 삼거리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쇼핑타운은 눈요기를 하며 걷기에 충분했다. 때로는 선착장에 올라가서 한없이 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번화한 거리에는 광고지를 나눠주는 꾸준한 손길이 있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손으로 건네지는 종이는 작은 인연의 끈이 되어 사람들을 모이게 만든다. 번화한 곳일수록 근처에서 뿌리는 광고지는 그 수를 더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때가 되면 거리 곳곳에 흩어지거나 쓰레기통 주위로 넘쳐버린 광고지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면 볼 수 있는 광경이기에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당시에 나는 건네지는 광고지를 쉽게 외면하지 못했다. 손 가까이 주어지는 종이를 지나치지 못하고 받아들어 꼭 한두 번은 눈길을 주었던 것이다.
어느 늦은 오후에 친구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며 남포동거리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누런 종이를 건넸다. 처음엔 그저 그런 광고지려니 생각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서 이런 너저분한 재생지에 광고를 하나 싶었다. 솔직히 지금 내게 그런 종이를 건네면 받을까 싶기도 하다. 알록달록한 광고지들의 향연 속에서 건네진 색깔도 예쁘지 않은 누런 종이에 인쇄된 까만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종이에는 뜻밖에도 고운 시 한편이 적혀있었다. 제목은 ‘목련’이었다.
‘저... / 멀리 / 화사한 / 목련의 모습 사이로 / 살며시 / 스치는 바람. / 화사한 햇살이 / 목련을 / 포근히 감싸는 모습을 / 나는 / 눈을 감아 보았노라.’
어떠한 기교도 없이 담담하게 인쇄된 까만 글자들이 은은한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어려서 그랬던 것일까? 사람들로 번화한 거리에서 건네어진 그 시가 적힌 종이를 그대로 버릴 수가 없었다. 내 손에 들려진 종이를 거리에 굴러다니는 전단지와 인쇄된 종이들 사이에서 뒹굴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때가 차가운 바닷바람 사이로 따뜻한 봄기운을 전하던 3월초였던 것 같다. 나는 그 누런 종이를 반으로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남포동 나들이를 했다. 4월에는 ‘일곱 살이 되고 싶어라’, 5월에는 “오월의 제비둥지에서”라는 시를 받았다. 세 번째로 받은 시에는 “이른 아침에 인생아저씨가 적다”라는 간단한 소개도 있었다. 이렇게 거리에서 시가 인쇄된 종이를 받을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남포동에 나갈 때마다 기대감이 생겼었다. 하지만 5월에 받은 세 번째 시가 마지막이었다.
우연한 만남은 말 그대로 뜻하지 않게 이루어진 만남이라는 의미이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자는 약속 없이 이루어진 만남은 뜻밖의 반가움을 선사한다. 나는 거리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남포동에서는 오랫동안 연락을 못하던 친구나 지인을 몇 번 만났지만,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듯 지나치는 일상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내게 건네어진 그 시들은 또 하나의 특별함이었다.
작년 여름에 오랜만에 남포동에 갔다.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장소답게 보도블록 위에 영화인들의 손도장이나 짧은 글들이 길을 따라 장식되어 있었다. 주변에 영화관들이 더 늘어나 있었고 눈부신 표지판들은 현란한 광고지만큼이나 색을 더하고 있었다. 이제는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옛 모습을 찾기는 힘들었지만 나는 재생 종이에 인쇄된 시를 나눠주던 아저씨를 떠올렸다. 그 아저씨의 모습을 제대로 본 기억은 없지만,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실까 궁금했다. 한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 세 번 이어지면 인연이라고 했던가.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아저씨가 건넨 시가 내 일기장 한편에 곱게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김순례   13-11-01 11:31
    
혹시 문학을 하게 된 동기?? ㅎㅎ
그렇게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군요.
남의 추억이지만 참 이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시 글을 열심히 쓰시게 되어 축하드려용. *^^*
문영일   13-11-19 09:20
    
낯익은 지명들과 눈에 보이는 붂적임.
보이는 듯 합니다.
부산 남포동, 광복동, 국제시장, 헌 책방.

헌 책방!
제가 중 2때 ,그곳에서 '지리부도'라는 책을 슬쩍 집어 들고 나왔던 기억.
그게 소도둑되는 바늘 도둑인지는 지금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죄와벌' 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처럼
지금도 나를 가끔 죄의식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나도 주장하지요.
"나도 사면 좀 해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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