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의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별이 있다. 자유가 시작되는 나이에 자유를 박탈당하고 생이별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삶에 대한 두려움까지 있다. 그래서 떠나보내는 사람도, 떠나는 이도 고통스럽다. 그곳은 각기 다른 지역, 나이, 학벌, 능력을, 단 하나 남자라는 공통분모로 만들어 버리는 곳이다.
그 예정된 이별이 내 아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저 내 품에 살던 아들이 남자라는 이름으로 이별을 해야 한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곳 그래서 더 이별답다. 그렇게 시간이 되어 불려가던 내 아들, 이젠 내 아들이 아닌 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무더운 여름, 태양은 가장 뜨거운 열을 발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그 시각은 운동장 한 가득 까까머리를 한 아들들뿐이다.
몸과 달리 눈빛은 사방으로 흩어져 누군가를 향해 반짝이고 있고 그 누군가는 그 곳만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이다. 각양각색의 옷들과 신발 그리고 손에 든 종이 가방들... 지금은 각자다. 그리고 지금은 누군가의 아들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남겨둔 체 군의 통제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순간, 아들 넷을 군대에 보내야 했던 엄마가 떠올랐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엄마는 지금의 내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먹고 살기 급급해서였을까 아님 넷이나 보내본 경험 탓이었을까, 내 기억 속에 엄마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도 오빠들 군대 갈 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
오빠와 아들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아들의 뒷모습은 하늘이 무너져 세상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6주 후, 그 운동장에서 우린 재회를 했다. 각자였던 그 아들들은 없다. 모두가 하나 같이 똑같은 옷과 신발과 모자와 피부색을 가진 군인만 존재하고 있었다. 수 백 명의 군인 속에서 내 아들 찾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무리 속에서도 내 아들만 딱 눈에 띄었었건만, 저 군인들 속에서 내 아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다 내 아들이었다. 그리고 산을 흔드는 우렁찬 목소리의 그 기세는 이별하던 그 날보다 더 큰 눈물이 되어 흘렀다. 감격, 감동 그 자체였다. 피부색은 모두가 동색이었고, 어디하나 새까맣게 변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귓등까지도 타 있었다. 건강한 군인이 된 아들들은 산이 떠나가라 어버이의 은혜를 불렀고, 한 목소리로 경례를 하며 부모님, 사랑 합니다!를 외쳤다. 눈동자도 흩어지지 않고 오직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6주 만의 기적이었다. 군대가 이런 곳이었다. 그만큼 그들에겐 자유가 없었을 것이고, 자유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의 소중함을 배웠을 것이다. 그 때 뿐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경험은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남자들은 군대 얘길 평생 하는 모양이다. 여자들이 출산 때를 평생 기억하듯이 말이다.
아들은 이미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6주간의 고된 훈련을 극복한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어깨를 추켜세운 모습이 그 전과 달리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드디어 남자의 군대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훈련 중 최고난이도가 월화산 행군 이었단다. 완전무장을 하면 배낭무게만 25kg, 거기에 군화를 신고, 산을 오르는 행군이었단다. 지난여름은 가장 무더웠다. 그 무렵 다른 훈련소에선 훈련병이 일사병으로 사망한 일이 뉴스에 보도되었었다. 그 탓에 모든 훈련병들에겐 2리터의 물병이 두 개씩 지급되었단다.
안 그래도 무거운 가방에 물 4리터는 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행군 출발부터 그 무게를 덜기 위해 서로 물을 주려하기도 하고, 그 물로 손을 닦기도 했었단다. 그러나 그렇게 물을 낭비했던 병사들은 결국 물이 모자라 얻어 마셔야 했고, 물이 많은 병사들은 또 그 물을 서로 주려고 야단법석이었다는 얘길 듣는데 그 모습들이 상상되어 웃기면서도 그 때의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싸하면서도 기특한 게 만감이 교차했다. 군화만 신고, 산에 올라도 발이 성치 않을 텐데 25kg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니 발이 성할 턱이 없었을 것이다. 허물이 다 벗겨지고 피가 나고 그래도 낙오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끝까지 버텨낸 그들은 결국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공동체의식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행군 중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는 중도 포기할 수 있단다. 그러나 훈련점수를 좋게 받을 수 없으니 자대배치 시 지장이 따른다. 모든 훈련은 평가가 이루어지고, 그 평가는 자대 배치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단다.
그런데 그 훈련 중에서도 정작 힘들었을 때가 훈련소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유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 때부터 고통이 느껴지는데 훈련소가 워낙에 커서 훈련병들이 머무는 곳까지는 거리가 꽤 멀단다. 그걸 아는 선임 병사들은 그들이 도착할 무렵 격려차 이미 마중 나와 박수로 맞이하는데 아들은 긴장이 풀리면서 지치기 시작해 걸음이 느려지고 다리 힘이 풀어지더란다. 그러나 자기가 쓰러지면 행렬이 흐트러질 것이며 그러면 질서가 무너질까봐 이를 악물고 끝까지 참고 했다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훈련병들이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라며 그래서인지 도착하는 순간 누구 할 것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체 눈물바다가 되었단다. 아마도 모든 병사들은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감격하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 훈련이 모든 아들들을 남자가 되게 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만큼 내가 보기에도 아들은 한 층 더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힘들고 어렵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이겨낸 그 시간들 때문에 그들은 그만큼 성숙해 지고 단단해졌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그 때 뿐일지라도 말이다.
아들이 어렸을 땐 가끔씩 불거지는 병역기피 문제를 볼 때마다 욕을 하던 나였다. 그러나 막상 내 아들이 군대 갈 때가 되니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병역을 피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부모의 마음일 게다. 그러나 입대 후 훈련을 잘 마친 아들을 보니 나에게 그럴 힘이 없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천만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세상은 공짜가 없다.
그 무더운 여름 정수기의 차가운 물은 늘 앞 소대에서 끝나 실온수의 물만 먹는다며 면회 올 때 차디찬 음료수를 가져 오라던 내 아들은 지금 상병이다. 6주 만에 1박의 외출을 맞은 아들은 모든 걸 낯설어 했다. 집으로 오는 휴게소에서 무엇을 사야할지 조차 몰라 난감해 하던 그 모습은 통제 속에서 자유를 만난 빛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 날 잠깐이지만 주어진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아들의 모습은 내 가슴 속에 차가운 얼음이 되었었다. 아마도 그것은 군복이라는 것이 주는 특별함인 듯하다.
그 예정된 이별을 한 후, 지금은 정해진 이별 속에 우린 매 달 만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별은 익숙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