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순
중국 톈진시정부(天津市市政府)에 파견근무를 위하여 중국에 들어온 날이 2013년 4월11일이니 벌써 7개월이 되었다. 파견을 위한 지원신청서는 마치 대학입시 입학사정관제 지원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 것만큼이나 부담스러웠고, 중국어 면접을 위하여 예상 질문에 대한 답안을 만들어 암기하는 것은 취업을 앞둔 대학 졸업생처럼 긴장되었다. 하지만 나의 공직관이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해왔으며, 왜 내가 파견근무를 가야하는지를 진솔하게 정리하는 과정은 나의 공직생활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처음 톈진에 올 때는 남편과 함께였다. 그 무렵 디자인전문계약직으로 일하던 남편은 채용기간이 만료되어 쉬고 있었다. 나는 신이 우리가족 모두에게 해외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며, 당장 직장을 구하는 것보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을 알게 되면 더 나은 길이 열릴 것이라고 남편을 설득하였다. 우리가 도착한 첫 날 톈진시의 외사판공실 아시아주 처장(天津市政府 外事?公室 ?洲 ??)과 내가 근무할 톈진시 관광국 시장촉진처 처장(旅游局 市?促?? ??)은 우리에게 환영만찬을 베풀어주었다. 중국공무원들은 처음 만났는데도 오래된 친구 같았다.
다음 날부터 이틀 동안은 인천시에 파견 될 톈진시 외사판공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가 미리 보아둔 일곱 집을 다 둘러보았지만 결혼 전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메이쟝(梅江)이라는 지역에 햇빛이 아주 잘 드는 집이 있어 그 집으로 결정하였다. 집안정리를 하면서 남편과 함께 이불, 식기, 가전제품 등 필요한 살림도구를 샀다. 마치 신혼살림을 장만하는 것 같았다. 다음 절차로 공안 메이쟝 파출소(公安 梅江派出所)에 가서 외국인거주등기카드(境外人?住宿登????)를 발급받고, 지정병원에 가서 건강진단(健康??)도 받았다. 열흘 쯤 지나서 집안살림살이가 웬만큼 갖추어지자 남편은 귀국하겠다고 했다. 그는 갓난아이를 떼어 놓고 가는 것처럼 안쓰럽다며 두 딸의 휴학처리가 끝나면 함께 오기로 하고 훌쩍 떠났다. 그 동안 남편과 함께여서 인지 외국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떠나고 나니 무인도에 혼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톈진공항(天津机?)에서의 첫 번째 작별이었다.
5월1일에는 인천과 톈진을 운행하는 크루즈 하이나호(海娜?)의 첫 출항식 행사를 위해 인천시 항만정책과 직원들은 정무부시장을 모시고 톈진에 왔다. 나는 톈진시 간부와 함께 공항으로 영접을 나갔다. 정무부시장님과 직원들을 만나는 순간 나는 새 색시가 친정식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기뻤다. 톈진시와 인천시의 자매결연 20주년에 맞춘 하이나호의 출항식은 큰 의미가 있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나는 공항에서 부시장님을 비롯한 항만정책과 직원들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성대한 행사 후 1박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국내에서와는 달리 외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석별의 정은 사뭇 달랐다. 이것이 톈진공항에서의 두 번째 작별이었다.
5월 8일 나는 톈진시 외사판공실의 부주임(副主任)과 함께 톈진시 관광국(旅游局)으로 갔다. 나는 국장님과 간부들에게 첫 인사를 했다. 톈진시 관광국에 외국공무원의 파견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번 파견근무를 계기로 인천과 톈진의 관광 교류는 물론 다양한 분야의 교류가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대화가 오갔다. 나는 톈진시 관광국이 있는 환발해발전센터(?渤海?展中心)26층 빌딩에 유일한 한국인 근무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서양 사람도 아닌데 "하이“ ”헬로우"라고 하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나는 관광마케팅을 하는 시장촉진처(市?促??)소속으로 근무지정을 받았다. 시장촉진처 부처장(副??)은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를 해주었다. 다음날인 5월 9일부터 나는 802호에서 혼자 근무를 했다. 이곳은 처장 이상은 모두 한 방에 한 사람씩 근무를 하고 부처장은 직원 2~3명과 함께 근무를 한다. 인천시는 주로 국장님만 독립된 방을 사용하고 과장님을 포함한 과 전 직원 20~30명이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지만, 이곳은 많아야 4명이 한 방에 근무를 하고 있다. 관광국 직원들은 대부분 아침 7시 반에 구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8시 반에 근무를 시작하여 오후 5시 반에 퇴근을 한다. 구내식당에서 나는 처음 먹어보는 중국음식의 이름을 물으며 먹는 방법도 배웠다. 직원들은 첫날부터 중국음식을 잘 먹는 나를 둘러싸고 물었다. "시관마?(???, 적응되었나요?)" 외국생활은 음식과 언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제 중국어만 열심히 익히면 근무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날마다 아침과 점심 두 끼 식사를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하니 유창하지는 않지만 중국인과의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
2013년 12월이면 인천시와 톈진시의 자매결연 20주년이 된다. 5월에는 톈진시장이 인천의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9월 2일부터 5일까지는 톈진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나는 파견전 함께 근무했던 국제협력관실 직원과 함께 행사장을 미리 점검하고 동선을 파악했다. 인천시 대표단은 인천시장 및 간부 18명, 시립합창단 59명과 서예가 전정우 선생이다. 톈진시 콘서트홀에서 울려 퍼지는 인천시립합창단의 우리민요 <아리랑>, 중국가요 <모어리화(茉莉花)>의 공연과 인천 서예가 전정우 선생이 쓴 다양한 서체의 천자문은 톈진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도시간의 교류도 개인과 같다. 관계가 이어지려면 꾸준히 만나야 한다. 인천시장이 참석하시는 행사라 나는 톈진시장과의 접견과 만찬에도 참석했다. 만찬장에서 톈진시 관광국장은 톈진시장에게 나를 소개주었다. 톈진시장은 파견근무를 마치고 복귀할 즈음에는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것이라는 덕담을 해주었다. 톈진시 직원들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외국에서 홀로 외롭게 근무하는 나에게도 상사와 동료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행사가 끝난 후 시장님께서는 공항에서 톈진대학에 유학중인 동료 직원과 나에게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격려해주셨다. 대규모의 대표단이 왔다가 한꺼번에 모두 떠나버리니 마음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이것이 공항에서의 세 번째 작별이었다.
섭섭함이 오래 남아있을 틈도 없이 그 날의 다음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톈진시 영빈관으로 향했다. 전날 톈진에 도착한 인천시 관광진흥과 팀장 일행과 합류해야하기 때문이었다. 9월 5일부터 8일까지 톈진시 관광국에서 주최하는 중국관광산업박람회에 인천시가 참가하는 행사이다. 부스설치와 박람회 준비를 위해 톈진시 관광국 직원과 우리시 직원 간의 중간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일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은 대부분 중간 간부가 결정하는 사안이 많으나, 중국은 고위층이나 총괄책임자까지 모든 것을 보고하고 신중히 결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일이 제때에 처리되지 못한 적도 많았다.
영빈관에 도착하니 톈진시 부시장 접견이 진행되고 있었다. 인천시도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4일간 부스를 운영하였다. 우리시의 관광진흥과 직원은 열정적으로 인천의 관광지를 소개했다. 나는 인천을 멋지게 표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중국어를 익혀야겠다고 결심했다. 톈진시 관광국에서는 행사참가자에게 톈진의 주요 관광지를 구경시켜주었다. 하이허(海河)강의 유람선을 타고 멋진 톈진의 야경을 본 참가자들은 모두 놀랐다. 이곳에 처음 와 본 사람들은 톈진을 관광할 곳이 없는 도시로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한국드라마와 연예인을 좋아하고 한국에 무척 관심이 많다보니 박람회 기간 중 인천시 관광책자와 관광지도를 많이 가져갔다. 이들이 다 인천으로 관광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행사를 마친 9월 9일 나는 관광진흥과 직원들과 공항에서 네 번째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또 한 달이 흘렀다. 10월 5일 톈진에서 동아시아경기대회가 열렸다. 내년 2014아시아경기대회 준비를 위한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시찰단이 톈진에 왔다. 2014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고 함성을 지르며 좋아하던 날이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내년으로 다가오다니! 대회 개막식과 경기 운영실태 등을 파악하기 위해 본부장과 직원 6명이 두 개 조로 나누어 경기장, 본부호텔, 등록센터 운영 등을 살펴보고, 2014아시아경기대회 홍보도 하였다. 10월 9일 다섯 번째 작별을 하였다. 순간 나는 철부지처럼 직원들을 따라 출국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해외여행을 다니며 여러나라에서 현지에 있는 한국가이드를 많이 만났었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며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문득 오래전 김훈이 불렀던 대중가요 <나를 두고 아리랑>이 생각났다. "나를 ~ 나를 ~ 나를 ~ 두고~ 산 넘어 가시더니~." 갑자기 톈진을 다녀간 분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모두 다 잘 지내고 계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