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역에서 천당역까지
이 경숙
2013년 8월 13일부터 2014년 1월 8일 까지 약 5개월 동안 우리 남매들이 엄마를 이사 보내드리는 준비 기간이었다. 96세로 천수를 다 하신 우리 엄마는 나름대로 효성스런 6 남매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 천당역을 향해 떠나셨다.
십 여년 째 당신 나이를 80세로 고정시킨 우리 엄마는 때때로 어린아이와 같았다. 새벽 한 시나 두 시에 일어나서 모시고 있는 남동생 내외에게 밥 하라고 깨우기도 하고, 밖을 나가면 집을 찿지 못해 헤매다 파출소 순경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 오기도 했다. 음식에 애착이 아주 많아 자제가 어렵고, 또 드시면 화장실 출입을 제 때에 못하고 옷에 묻어도 감각이 둔 하셨다. 주위에서 꼭 도와드려야 했다. 음식을 조정해 드린다는 것이 자식으로서 참 미안하고 죄송했다. 엄마를 방문 할 때, 간식을 가져가면 올케를 주어야 했었다. 숫자 개념이 없으니 언제부터인가 용돈을 드려도 사용이 불가 했다. 유난히 부지런하고 알뜰한 엄마였는데.
남동생 내외는 요즈음 보기 드문 효자 효부였다. 별 내색 없이 참고 생활했던 올케는 척추가 십도는 옆으로 구부러져도 수술도 못하고 통증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너무 안스럽고 미안했다. 수술하면 몇 달간은 몸을 쓰지 않고 조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엄마가 계시니 수술을 미루고 있었다. 시집와서 시 할머니를 모셨고, 지금껏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무던하고 신앙심 깊은 내외가 항상 고맙고 든든했다. 동생 내외를 어떻게 도울까 궁리를 했다.
요양원을 생각했다. 차마 며느리는 제안 할 수 없을 터이니 딸인 내가 주선해야 했다. 동생이 다니는 성당에는 영안실이 없기에 수소문 해서 주소를 옮기고 절차를 안내 받았다. 구비서류를 준비해 건강검진공단에 연락해서 요양등급을 받기 위해 방문 날자를 예약 받았다. 재가 방문 치료를 위해 동생 내외가 세 번 이나 의뢰 했지만 요양 등급을 못 받았다. 엄마께는 좀 죄송하지만 그길 밖에 없었다. 드디어 직원이 왔다.
“할머니, 이 곱하기 오는 얼마에요?”
“십이지”
“오백원 으로 백원 짜리 과자를 두 개 사면 얼마 남아요?”
“젊은이, 그렇게 어려운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 젊은이는 아까 보고 또 보네, 오늘 두 번 이나 만나네” . 처음 만난 공단 직원에게 엄마는 묻지도 않은 말씀까지 하셨다. 그는 나에게 몇 가지 보충 질문을 했다. 엄마의 용변문제. 요즈음 기억력 또는 행동에 대해서, 나는 그 직원에게 아는 대로 설명을 하고, 동생 내외의 고통을 좀 덜어주고 싶고, 동생 내외가 엄마와 허락된 마지막 시간 까지 감사와 보람과 사랑을 가진 상태에서 아름답게 이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엄마는 요양 등급 3등급을 받았다.
복지사로 있는 지인의 소개로 ‘작은 안나의 집’에 모시기로 했다. 그곳은 산 밑에 붉은 벽돌로 새로 지은, 아늑하고 조용한 집이었다. 그날, 동생 내외와 언니 그리고 나는 대 죄인이 되는 날이었다. 집에서는 낮에 거의 혼자 계셔서 사람이 그립지만 그곳에는 친구들이 많으니 덜 외로울 거라고 우리 형제들끼리 자위를 했다. 영문도 모르고, 어딘지도 모르는 엄마를 그곳에 남겨놓고 돌아설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란 내 표현으론 부족하다. 언니는 많이 울었지만 나는 울 수가 없었다. 울음 자체도 위선으로 느껴졌다. 착한 동생 내외는 얼마나 마음이 아팟을까?.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누구도 말이 없었다. 하늘을 쳐다 볼 수도 없었다. 딸 삼형제를 낳고 얻은 아들이라 엄마에게는 당신 목숨 보다 더 소중한 아들 이었다. 우리들은 평소에 엄마는 형돈(남동생)이 두고 어떻게 돌아 가실까 했었다. 그런 아들을 떨어져 오늘 밤을 어찌 지내실까 마음이 메어 온다. 나의 모든 행동이 위선이나 가식인 것만 같아서 기도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밥 먹을 때면 “물 마시고 먹어라, 막힌다” 하시며 옆에서 물을 권하고, 겨울이면 발 시릴세라 신발을 따듯하게 준비해 주시던 엄마였다. 생활비 아낀다고 먼 시장을 보면 딸이 골병 든다며 가까운 곳에서 장 보고 무거운 짐 들지 말라고 하시던 잔정이 많으신 엄마였다. 마음이 텅 빈 것 같다.
엄마가 당분간은 힘 드시지만 며칠 계시면 적응이 될 거라고 복지사는 말했다. 우리는 매일 봉사자와 통화하며 엄마의 근황을 물었다. 처음에는 힘 드셨지만 식사는 잘 하신다고 했다. 얼마 후에 우리가 첫 방문을 했을 때 엄마는 너무 반가워 아들을 붙들고 어쩔줄을 모르셨다. “내가 밖에 나갔다가 길을 잃어 울고 있을 때 어떤 젊은이가 나를 이곳에 데려다 주었다”고 하시며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아들 손을 놓지 않으며 “하느님, 감사합니다” 를 연발 하셨다. 너무 측은하고 가여운 우리엄마, 치매라는 병을 일찍 예방하지 못한 무지한 자식들은 가슴을 치며 부끄러워 하고 있다. 가능하면 형제들이 자주 찾아 뵈었고 생신 때는 모시고 나와 며칠 동안 함께 지냈다.
요양원에 가신지 4개월 만에 연락이 왔다. 식사를 잘 못하신다고 해서 부근에 있는 병원으로 모셨다. 엄마는 동생 내외에게 “내가 얼른 가야지, 너희들을 고생 시킨다”고 하셨다. 신부님을 모셔와 마지막 종부 성사를 받으셨다. 의사는 호스를 이용한 식사를 권했다. 영양주사를 맞으면 돈이 더 든다고 했다. 우리는 환자나 보호자가 원치 않는다고 했다. 식사를 못하시니 링겔과 영양주사로 10일이 경과했다. 병원이 너무 멀어 가까운 곳으로 모셨다. 상태가 좋지 않아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단다. 이곳 병원에서도 코로 호스를 이용한 식사를 권했다. 중환자실의 환자 열에 아홉은 그렇게 했다. 호스를 청소할 때 거의 죽은 것 같은 환자들은 얼마나 괴로우면 고개나 몸을 반은 일으킬까.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싫었다. 96세의 노인이 인위적인 의료행위로 며칠 더 연명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통만 연장 될 뿐이다. 엄마는 코에 작은 산소 호흡기로 보충하며 주사로 지내셨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매일 병원을 가면 얼마 남지 않은 그 소중한 시간에 엄마가 세상과 자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엄마의 삶이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귀속말로 엄마와 대화를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도 들려드리고, 기도를 하며 엄마도 함께 하자고 권한다. 사람은 귀가 제일 나중까지 열려 있다고 한다. 동생은 식어가는 엄마의 손 과 발을 문지르며 따뜻해 지길 바라면서 함께 기도하자며 엄마 손을 붙잡고 성호를 그었다. 우리는 엄마의 임종을 잘 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낮에 병원을 다녀왔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가슴이 덜컥했다. 한 걸음에 뛰어가니 산소 호흡기를 끼워 놓았다. 굵은 호스를 두개나 입에 넣으니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하나는 산소호흡기이고 다른 하나는 혀가 말리지 말라고 끼는 것이란다.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코에 호스 끼는 것을 반대 했더니 대신 산소 호흡기를 끼웠다.
환자에게 인위적인 의료 행위를 할 때는 보호자에게 상의 해야 되지 않느냐고 간호사에게 항의를 했다. 그렇지만 내가 차마 그것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용히, 그리고 아름다운 엄마의 얼굴을 그대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임종을 앞둔 엄마를 며칠 동안도 온전히 지켜드리지 못해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그로부터 삼일 뒤에 엄마의 모든 심장박동과 혈압을 그려내는 기계는 정지했다. 엄마가 역을 출발하신 후에도 산소 호흡기는 탁탁 소리를 내며 혼자서 소임을 다 하고 있었다. 의사가 기계의 작동을 멈출 때 까지 .
이제는 우리형제들의 구심점이며 마음의 고향이던 엄마는 그렇게 아끼던 자녀들을 뒤로하고 되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