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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축    
글쓴이 : 김양아    14-04-30 08:53    조회 : 6,564
 
 압축
 
 
 
  일 년 만이었다. 참 더디게 시간이 흘러가는가 싶었는데 그래도 계절들이 어느새 한 바퀴 돌아 딸아이를 마중할 겸 다시 그곳에 다녀왔다. 지난번엔 딸과 함께 출발해서 혼자 돌아왔지만 이번엔 혼자 떠나서 아이와 함께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작년 봄, 며칠째 미루던 짐싸기에 속도가 붙자 압축팩 속으로 잡다한 일상이 빨려 들어갔다. 납작하게 밀폐된 옷가지와 이불, 커다란 짐가방들을 양손에 끌고 집을 나설 때 아직 입 다물고 있던 개나리 꽃망울이 배웅해주었다.
 간사이공항에 내려 처음 우리가 간 곳은 오사카 중심가에 있는 신사이바시와 난바, 끌고 온 짐을 숙소에 내려놓고 거리를 구경하다보니 금방 날이 어두워졌다. 먹거리 천국답게 입체적인 간판들이 독특한 난바의 식당 골목에서 저녁을 먹고 오사카에서 짧은 쉼표를 찍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무거운 짐을 끌고 교토로 출발했다. 교토역에 내리니 마침 마이코(舞妓) 분장을 한 여인들이 관광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벚꽃 축제 기간이라 그런 것 같았다. 이곳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딸이 교환학생으로 다니게 될 학교엔 벚꽃이 만발했고 분홍 동백 울타리도 눈길을 끌었다. 기숙사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나즈막한 집들과 나무들도 매혹적이었다.
 그날 오후 아이는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기숙사로 들어가고 나는 허전한 마음 가득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곳은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 많지 않아서 당장은 아이와 연락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거의 하루 종일 혼자 보내야 했다.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지만 그래도 흐드러진 꽃들과 풍경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가장 먼저 들린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엔 한창 벚꽃시즌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관광 안내 책자에서 보았던 몇 군데를 짚어가며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 길, 상점에 들려 구경도 하고 소소한 선물을 몇 개 사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딸아이는 그곳의 한 상점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다.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기에 한국학생 한 명, 중국학생 한 명을 채용했다고 한다. 딸은 돌아올 때 갖고 올 선물로 그곳에서 직접 만드는 장바구니와 지갑 등을 틈나는 대로 챙겨 놓으면서 어쩌면 자신은 직원이 아니라 가장 큰 고객이라고 웃었단다.
  그 다음에 간 곳은 긴카쿠지(銀閣寺)와 철학의 길, 절에 들어가는 입구에 키 높은 동백나무 울타리와 차곡차곡 쌓여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고 있는 정갈한 모래정원이 인상적이었다. 산책코스로 유명한 철학의 길은 물길 따라 길게 벚꽃 터널이 뻗어있었다. 한참 걷다보니 꽃멀미가 날 것 같았다.  아이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때 까지 그렇게 낯선 곳을 혼자 헤메고 다녔다. 발길과 눈길은 마음과는 따로 붕붕 떠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서둘러 아이와 약속한 장소로 가서 인터넷과 휴대폰에 꼭 필요한 와이파이부터 해결하고 저녁을 먹으며 하루 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헤어져야 할 시간 "우리 딸, 잘 할거야... 즐겁고 건강하게 잘 지내다 와" 하며 꼭 끌어안았다.
  다음날 공항으로 오는 길에도 늘어선 벚꽃들이 환한 얼굴로 무심하게 웃고 있었다. 부풀어 커지는 빈자리에 자꾸만 차오르는 부질없는 생각과 물기 차오르는 마음을 꾹 누르며 돌아와야 했다.
  그리곤 계절마다 EMS상자에 먹거리며 옷 따위를 눌러 담아 보냈다. 조금이라도 더 담아 보려고 압축 또 압축을 했다. 초반엔 지진 때문에 다음엔 방사능 때문에 걱정되고 불안이 차올랐지만 아이가 블로그에 올리는 일상들은 오히려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 홀로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았다.
  12월 말부터 1월초까지 열흘간 겨울방학이라 기숙사도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 들어왔다 가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룸메이트와 다른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면서 교토, 나고야, 히로시마, 오사카 이렇게 여러 곳을 돌면서 연말연시를 보냈다. 각 가정에서 설음식도 먹고 세뱃돈도 받으면서 명절 체험을  잘 하고,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훈훈한 대접을 받았다고 흐뭇해했다.
   1월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정리를 시작한 아이는 생활용품들은 필요한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또 치우는 일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그리고는 여름옷과 물건들을 부쳐왔다.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나는 여행 때면 즐겨 읽는 기욤 뮈소의 최근작 한 권과 아이가 부탁한 몇 개의 선물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어두워질 무렵에 도착한 공항에서 리무진을 타고 한 시간 반을 더 달려 도착할 때까지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멀리서 트렁크를 끌고 나타나는 딸아이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에 얹혀있던 무거움이 봄눈처럼 녹아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이가 미리 예약해 놓은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기숙사에 들려 마지막 인사를 하기로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서 눈발도 날리고 비록 날씨는 궂었지만 평소에 아이가 주로 다니던 곳들을 함께 가보면서 그동안 지냈던 일상을 되짚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인사해야할 곳에 들려 갖고 간 선물을 건네면서 아이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교토는 물맛이 좋아서 맛챠와 두부가 유명하고, 겨울에는 유도휴를 먹어야 제맛이라서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다는 코스로 이끌었다. 붉은 동백꽃잎이 떨어지는 정원이 내다보이는 자리에서 여러가지 요리의 두부를 맛보면서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돌아와서 새로 시작해야하는 부담을 내비치는 아이에게 지금까지 혼자 잘해왔던 것처럼 잘 할 수 있을거라는 격려 외에는 해줄 수가 없었지만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서로 따뜻했다. 또 교토는 녹차도 유명하기에 숨은 맛집을 찾아 녹차 카스테라 파르페를 먹기도 했다. 짐이 워낙 많아서 더 늘이면 안되었지만 결국 겨울에만 한정된 것 이라는 말에 유자와 녹차 맛이 반씩 섞인 바움카스테라 몇 개를 사고 말았다.
  그동안 늘어난 짐을 다시 끌고 돌아오는 길, 팔은 비록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누르면서 담고있는 일 ,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반복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일이란  때가 되어 매듭이 풀리는 순간을 기다리며 견디는 일인 것 같다.
? 집에 들어선 후 가져온 트렁크들을 여는 순간 쏟아져 나오는 아이의 일상들이 편안하게 제자리를 찾기 바래본다. 동시에 내 마음의 압축도 풀리며 비로소 안도감과 평온함이 부풀어 올랐다.

윤효진   14-04-30 12:25
    
잔잔하고 여유가 있으십니다.  엄마의 마음씀이 다가오는군요.
'살아가는 일이란 때가 되어 매듭이 풀리는 순간을 기다리며 견디는 일인 것 같다'  그런 날이 제게도
오겠지요?  ^^;;  건필하세요.
     
김양아   14-05-01 18:20
    
윤효진샘~
어느새 5월이네요... 성례샘 등단파티때 뵙긴 하겠지만
건강하고 즐겁게 여행 잘 다녀오시고, 눈과 마음에 좋은 추억 많이 담아오시길요^^
권정희   14-05-01 11:46
    
김양아선생님! 드디어 글이 올라왔군요. 짝짝짝 ^ ^
압축! 여행가방에 어찌 그리 많은 압축이 들어 있는지요. 역시 함축과 상징의 기술사입니다.
딸 덕분에 좋은 구경하셨네요. 혼자서 척척 자신의 행로를 개척하는 딸이 듬직해서 행복하시겠어요.
교토와 오사카 너무너무 좋은 곳 같아요. - 누르면서 담고 있는 일-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많아 공감이 갑니다.
     
김양아   14-05-01 18:28
    
마치 선생님께 칭찬 받는 학생 같은 기분이 드네요...^^
긴 호흡으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풀어내시는 샘의 글들을 접하면서 앞으로도 많이 배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동이라는 멋진 곳의 이야기도 가끔 들려주시구요...^^
홍성희   14-05-05 15:19
    
한동안 글 안올려 궁금했었는데 드뎌 올리셨네요~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떻게 이렇게 다른 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지 감탄할 따름이네요.
샘의 섬세한 표현이 너무 좋아요, 옆에 있으면 나도 좀 늘려나?~~
아, 지난 주 어머니에 대해 쓰신 글 '신발'도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단아한 샘의 모습처럼 제목도 한 단어로 깔끔해요 ㅎㅎ
월요일에 뵈요~
     
김양아   14-05-13 09:56
    
언제나 푸근한 홍성희샘 늘 환한 표정으로 총무일을 잘 해내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지난번엔 사위의 첫생일도 손수 챙겨주셨다니 참 부지런하시고 넉넉한 품이 느껴집니다
다이어트에서 톡톡 튀는 글, 연희동 빨간집에서의 따뜻하게 그려낸 아버지와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 등
성희샘 나름의 스타일로 좋은 작품 많이 쓰시길요...
김성례   14-05-08 23:33
    
딸을 그리고 만나서 함께한 날들이 오롯이 느껴집니다.
헤어짐이 아프고 애잔하지만 만남이 있어서 기쁨으로 승화하네요.
제목과 주제가 잘 맞아 떨어진 도쿄와 오사카로의 여정을 압축이란
두 글자 속에 아름답게 녹아있네요. 양아 샘께서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엄마의 마음인 것 같아요.
샘의 글 읽으면서 저도 딸 생각에 가슴이 아려오네요.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하시고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김양아   14-05-13 10:01
    
등단 파티에서 성례샘의 예쁜 따님을 볼 수 있어 반가웠어요
커갈수록 딸은 친구 같지요..? ^^ 함께 있는 동안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야할 것 같아요
등단이라는 한 고개 넘으셨으니 또 다른 마음으로 열심히 작품 쓰시길요
그리고 편안하고 충전하는 좋은 여행 되시구요
임정희   14-05-19 22:57
    
압축, 단어 하나에 삶을 오밀조밀 엮어내는 글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선생님 마음 아래 압축되어 있던 문학의 열정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꾹꾹 누르지 마시고 확~ 펼치시와요.
마주 보기만해도 서로 따뜻해지는 엄마의 딸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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