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 어제 우리 엄마랑 아빠가요...” “선생님, 우리 집 강아지 몽이가요....”
“선생님....” “선생님....“
병아리 같은 아이들은 자기를 보아 달라고 코 앞에 딱 붙어 미주알고주알 종알거린다.
‘아, 피곤해!’
오랜 경력의 교사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장단을 쳐주지만 머리 속으로는 다음 시간을 정리하고 있다. 나쁜 직업병이다, 아이들에게 집중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본인은 점점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산만해지는. 그런 교사로서의 오랜 경력을 가진 내가 아버지에 관한 글을 잘 써서 당신 손주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선택한 이 강의실에서 용감하게 선택한 자리는 앞자리, 그것도 선생님과 시선이 제일 먼저 마주치는 자리였음은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이야기 해보세요, 어떻게 보셨어요?” 자고로 학생 입장에서 재미있는, 교사 입장에서 만족스런,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간이 휘리릭 잘 가는 수업은 되는 말이든 안되는 말이든 맞는 말이든 틀린 말이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수업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내게,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인 강의실의 자리는 그만 덫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이야기 해 보세요” 하시며 마주친 시선이 나를 지적하신 것 같았고 또 내 교직 경력이 ‘이러했기에’라는 핑계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마녀 주문에 걸린 듯 주절주절 떠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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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도 한번 넘어보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내 아이들, 그러니까 내가 가르치던 우리 반 아이들은 뜀틀 수업에 있어서는 100% 수업 목표를 달성하였다. 한 단만 더 높여주세요, 한단만 더... 한번 넘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더 높은 단계의 도전을 원했고 학년 수업 목표를 훌쩍 뛰어넘으며 희열을 느꼈었다.
내 삶에 있어서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면 뜀틀을 넘어야 학점을 받을 수 있었던 교대의 '체육 실기'란 수업이 유일한 것 같다. 그러나 그 학점은 졸업을 하고 교사 자격증을 받는 필수 이수 학점이었기에 결코 포기 할 수 없었던 수업이었다. 모든 친구들이 체력장에서 특급을 받던 중고교 시절에서도 운동 신경이란 눈꼽만치도 없기에 전교에서 손가락에 꼽는 2급으로 대만족을 해야 했던 내게, 뜀틀이라니..... 그런 나를 역사적 아픔인 광주 민주화 운동이 살려 주었다.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 졌고 실기 수업은 리포트 제출이라는 방법으로 대치되어 교대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뜀틀을 넘지 않고 졸업학점을 받았던 학번이 되었다.
그런 내게 아이들이 도전장을 내보인 것이다. 이럴 경우를 당했을 때 솔직함만이 또 다른 도전에 대한 뒤탈 없는 수비임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승리자들에게 애처로운 모습으로 그리고 확신을 갖고 방어를 했다.
“선생님은 뜀틀 못 넘어, 지금까지 한번도 넘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어서 못 넘는가는 알기에 너희들을 가르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결코 솔직하지는 않았다. 경험이 없었기에 발판을 차고 올라 착지 할 때까지의 자유로움을 난 절대로 알 수 없었다.
수필반 선생님, 그리고 선배님.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쓴다는 것, 발표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전혀 모르고 주저리주저리 떠든 제 모습에서 ‘날아올랐을 때의 자유로움’으로 행복했을 아이들의 가슴은 모르고 단지 내 목표 달성을 했다고 기뻐한 과거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어리고 어린 짓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용감하게 잡은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치는 내 자리'가 발목을 잡아, 그리고 무언가 이야기를 해서 서툰 생각이라도 주고 받아 흥미로운 분위기로 가고 싶어 '생각 없이 떠들었음'이 막상 글을 쓰려니 제 앞의 아득한 허방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목표가 있기에 포기 하지 못하고 참으로 어리고 어리고 어리다 한탄하고 한숨을 쉬며 글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