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에 독립을 꿈 꾼 나는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선택했다. 물론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있었다.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하지만 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가 아니었다면 난 아마도 결혼을 안 했을 것 같다. 물론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와 살면서 난 그가 나의 배필임과 그 때가 나의 결혼 적령기였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독립을 가장한 결혼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오빠 넷에 막내인 나는 고명딸이다. 어마무시하게 사랑을 받아 자유가 늘 그리웠다. 내 나이 스물한 살이었으니 나는 몹시 이상적이었고 그런 나와 달리 9살이 많은 그는 몹시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랑이란 감정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내게 그저 좋은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의 결혼을 꿈꾸었다. 그를 만난 건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 내가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내가 있던 6개월 동안 그는 나를 지켜본 모양이다. 단 한마디 말도 나눠 본 기억이 없는 그가 내가 일을 그만 두는 날 용기를 냈던 것이다. 그래서 한 달 정도를 만나 봤는데 난 현실적인 그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모든 관심사가 먹고 사는데 집중 되어 있었다. 나와는 통하는 게 하나도 없어 그와의 만남 자체가 답답했다. 그래서 난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는 내의사와 상관이 없단 듯, 내 보디가드인양 나를 지키고 챙겼다.
단조로운 내 생활패턴을 꾀고 있던 그는 퇴근 후엔 없는 차를 빌려 내가 다니고 있던 학원 앞에 기다렸다가 나를 집에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그의 친절과 편리함을 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 마음의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 오빠들이 문제였다. 욱하는 성미가 일을 키우고 말았다. 그에게 손 지검을 한 것이다. 그 때 내 귀가 시간은 밤 9시였다. 나를 데려다 준 그를 오빠들이 본 것이다. 남자도 나이 많은 남자인 것이 용납이 안 된 것이다. 이유가 어떠하든 난 창피했다. 주먹이 먼저 올라간 오빠들의 성질머리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난 자유를 갈망했고, 독립을 꿈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립은 무리였다. 결론은 독립을 위해 결혼이 최선이었다. 난 결혼을 하기 위한 모색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에 결혼을 하겠다고 시켜줄 일이 만무했다. 뜻이 있는 곳엔 길이 있다는 말, 그건 맞는 말이다. 내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오른걸 보면 말이다. 나의 그 생각은 결혼을 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혼인신고다. 결혼도 안 한 여동생을 이혼녀 만들 것 같지 않았다. 기막힌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나의 의지가 분명하다는 걸 알게 된 그 남자는 나를 갖는 게 급선무였던 모양이다. 결국 난 지금의 딸을 가지고서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난, 보기 좋게 호랑이 굴에 들어앉은 여우 꼴이 되었다. 호랑이 굴에서는 옷도, 머리 모양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그 호랑이의 여우일 뿐이다. 앨범을 보면 그때 여우는 늙은 여우다. 예쁜 사슴을 늙은 여우로 만든 남자를 이해하는데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3년이란 시간 동안, 우리에게 살면서 흘려야 할 눈물과 고민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난 그 때 흘릴 눈물 다 흘리고 고민도 다 했다. 이 남자와 살고 안 살고의 고민부터 시작해서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내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두 아이를 가진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난 문구점에 가는 걸 좋아한다. 어느 날 예쁜 노트 한 권이 내 눈에 띠었고 난 그 노트를 샀다. 여자에게 자유시간은 아이들이 잠 든 밤이다. 남편은 귀가 전이고, 아이 둘이 곤히 잠든 그 시간만은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비로소 내가 나인 시간, 나일 수 있는 시간, 나여야 하는 시간 말이다.
낮에 산 노트를 꺼내놓고 펜을 들었다. 뭘 하려고 하는 건 없었다. 그냥 노트가 예뻤고 펜을 들었으니 뭔가 쓰면 되는 거였다. 딱히 쓰고자 하는 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무언가에 이끌리듯 난 노트에 남편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노트의 반을 접어 한 쪽엔 장점, 다른 한 쪽엔 단점 이라고 적었다. 그 때 알았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그리고 단점이라 적은 쪽으로 달려간 볼펜은 사물놀이의 상모 돌아가듯 했다.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반 쯤 더 내려가서야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 참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볼펜이 제 정신을 차리는 듯 했다. 내용은 이랬다. 나가면 전화를 할 줄 모른다. 외박을 해도 무소식이다. 무관심하다. 자상하지 않다. 자기 맘 대로다. 의논이란 할 줄 모른다. 자기가 제일 잘 났다. 등등
노트를 다시 앞 장으로 돌렸다. 그리고 장점이라고 적은 면에 볼펜을 갖다 댔다. 그런데 볼펜이 꼼짝을 안한다. 손모가지는 굳어 버린 듯 볼펜의 목만 부여잡고 있었다. 볼펜은 목이 메는지 얼굴이 시뻘게졌다.
손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삼 십 여분을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볼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 한 줄, 꾸역꾸역 써 내려간 글씨는 생.활.력.이.강.하.다. 였다.
힘들고 어렵게 실랑이를 벌이며 적어낸 그 문구는 상모 돌아가듯 써 내려간 단점이 내게 주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었다. 단점은 내가 다 아는 얘기였다. 너무 잘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장점은 단 한 줄 이였지만 내가 몰랐던 사실이었고,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며 처음 안 사실이기도 했다.
충격이었다. 내 남자에게 이런 점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 때 알았다.
지난 3년의 세월이 힘들었던 이유와 불행했던 이유를 말이다. 흘려야 했던 눈물도 바로 내가 단점만 보고 살았기 때문이란 걸.... 그에겐 단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난 단 한 번도 그의 장점은 생각 해 보지 않았었다. 그에겐 모든 게 다 단점만 있었다. 내가 그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고, 그를 그런 사람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은 내게 있었다. 그가 날 불행하게 했던 게 아니었다. 그는 여전하다. 그리고 그대로다. 그러나 난 이미 내가 아니었다. 그 노트 한 권이 나를 다른 사람이게 했다. 그 후로 내 세상은 달라졌다. 내 남자는 그대론데 그가 달라 보였다. 그는 여전히 그인데 말이다. 난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난 그 순간 능동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새로운 사실은 없던 게 생겨나는 게 아니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뿐이다.
난 내 남자의 장점이 다른 사람들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단 한 번도 돈 때문에 내가 고민을 해 보지 않았었다.
그것이 고마웠고 그런 그가 고마웠다. 그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편모에 의해 살았던 그는 아버지의 빈자리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좋은 아버지는 돈을 잘 버는 아버지라는 공식이 성립된 사람이었다.
그가 살면서 생각한 좋은 아버지와 남편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자상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돈 버는데 최선을 다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내게 해 주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해 주지 못 하는 것만 바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 불행의 이유는 내 안에 있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내게 그랬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 세상인데 그 세상이 그 세상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상을 난 마주하고 있었다. 그 노트 한 권이 내게 준 세상이다. 그리고 내 인생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