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사촌 형님이 전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로 “자네 이쁘게 봤드만 영 못 쓰것네, 자네가 시방 지정신인가? 어디 버르장머리 읍시 어른의 흉을 보고 입을 나불거린당가!”로 시작된 호통은 한 참 후에야 끝이 났다. 그 전화기 너머로 그동안 친형님과 나누었던 시모의 험담을 고스란히 되받아야 했다. 난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사촌 형님의 말은 다 사실이었고, 내가 한 말들이었다. 순간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난 정중히 사과를 드렸고, 다시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다짐도 드렸다. 그것은 진심이었고, 내 결심이었다. 처음엔 어이가 없고, 친형님이 미웠다. 하지만 내가 한 말들이 돌고 돌아서 다시 내게 온 것뿐이다. 그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내가 했던 말은 홀로 오지 않았다. 나를 낮게 만들고, 나를 욕되게 했다, 이자다! 그것은 내가 받아들여야 할 대가였다. 뒷담화에 대한 수수료! 그것은 내 몫이다. 그러나 다시 받고 싶은 건 아니다. 그건 분명했다. 그렇게 대놓고 혼을 내 준 사촌 형님 덕에 난 뒷담화를 멀리하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사촌 형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제는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뭔가 어렵게 말을 꺼내는데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형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했더니,
“아, 왜 지난번에 자네가 나 빌려준 돈 말이네, 내 그걸 갚아야 하는데...미안해서...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말이라도 할라고 맘먹고 전화 했네”난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다.
“돈요? 제가 돈을 빌려드렸어요?” 내가 몇 년 전 사촌 형님에게 돈을 빌려드렸단다. 그런데 사실 난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돈에 관해선 아주 정확한 내가 말이다. 순간 이 돈은 내 돈이 아니구나 싶었다.
“형님! 나 그 돈, 기억도 안 나는 걸 보니 그건 내 돈이 아닌가 봐요. 그러니 안 갚아도 되겠어요! 잊으세요.”형님은 그 돈을 갚지 못하고 있어 나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갚지도 못 하면서 말로만 미안타 하기도 그래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은 것이다. 순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나 행동에 행여 라도 서운한 게 있었다면 그 얼마나 서럽고 맘이 힘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형님, 그동안 나보는 게 힘들었겠다, 이제 다리 뻗고 주무세요. 세상에나 형님 지옥에서 사셨네, 그간..”그 분은 충분히 그러셨을 것이다. 소심하고 신중한 분이니 더 그랬을 것이다. 그 옛날 당당하던 사촌 형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도리를 다 못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다가 이 형님의 남편은 J은행의 지점장이셨다. 그 당시 화이트칼라다. 안씨 집안의 장손이자 형제들 중에 제일 잘 나가는 분이셨다. 20여 년 전 사업을 시작한 우리 신랑은 사촌형(아주버님)의 권유로 J은행에 적금을 들었다. 그리고 우린 그 돈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아주버님은 적금이 만기가 되자 찾아서 주식을 한 것이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그 뿐 아니라 대출까지 받았다. 그러다 IMF가 왔고 아주버님은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 명예퇴직을 선택하셨다. 하지만 대출금이 많아 퇴직금도 한 푼 받지 못 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그 돈은 티끌 모아 먼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신랑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촌형에게 그 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물론 말한들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서운한 마음도 내색하지 않는다. 지금 그 아주버님은 신랑 소유의 편의점에서 점장으로 일하신다. 게다가 조카도 신랑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신랑을 존경하는 이유다. 본인이 당해 속상하고 화나고 억울할 텐데도 오히려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어제 사촌 형님과 통화를 하고 나서 난 깨달았다. 우린 피해자였다. 분명히 돈을 빼앗겨 손해를 봤다. 그런데 돈을 잃은 건 우리지만, 우린 그 때 보다 더 잘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빼앗긴 돈은 지금까지 하늘에서 받고 있다.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누울 집이 있고, 돈 빌리러 안 다니니 말이다.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 그래도 난 사촌 아주버님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사실 내 마음에선 그 분을 지운지 오래다. 난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다. 가족이니까, 봐야 하니까 보는 거다. 그런데 신랑은 어떤 마음일까 궁금할 때가 있다. 내 보기에 그는 나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랑이 하는 사업이 잘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돈은 돌고 돈다.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한다. 내 생각으론 여기에 줬으니 여기서 받아야겠지만 저기서 받을 수도 있다.
하늘은 안다. 그래서 하늘이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다 보려고, 다 보고 있다가 공평하게 아주 공평하게 돌려주려고.... 그것을 뿌린 대로 거둔다고 우린 말한다. 우리가 잘 살아야 할 이유다.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다. 어제 사촌 형님과의 통화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나를 보며 신랑에게서 또 하나를 배운다. 선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