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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 한번의 이사    
글쓴이 : 허향심    12-08-09 20:19    조회 : 6,526
스물 한번의 이사 
 
포장 이사가 없었던 1977년도부터 5년 동안에 이사를 열네 번 하였다. 한 달 전부터 박스를 얻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 하여 짐을 꾸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적어 이사를 한 뒤 필요한 박스만 뜯어 사용하면 다음 이사를 할 때까지 뜯지 않는 박스도 있었다.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36년 동안 결혼 생활 하면서 건설 현장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열 여덟 번의 이사를 하였으며 작은 이사까지 합하면 스무 번을 하였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새로 입주를 하는 아파트로 경찰 공무원이었던 여동생이 이사를 하면서 가깝게 오고 가며 살자고 비어 있는 집을 말없이 500만원을 주고 계약 해 놓아 계약금 때일까 봐 전에 살던 아파트를 급매로 팔고 이사를 와 10년을 살고 있다.
 
결혼 초 중매를 한 사람이 남자 쪽에서 집을 사준다 해서 결혼을 했으나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방 2개 전세를 얻어 주면서 남동생까지 같이 살게 하였다. 그 집에서 5개월을 살았을 때 가방 2개에 들었던 폐물과, 액세서리를 도둑을 맞았다. 도둑은 담을 넘어 들어오면 대문을 먼저 열어 도망 갈 준비를 한다는데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화장실 앞에 두 개의 빈 가방만 놓여 있는 것이었다.
날이 밝아 경찰이 오고 갔을 때 동네 사람들은 주인이 도둑이라는 것을 말해 주어 주인 여자에게 움직이지 말라 하여도 두 번씩 나갔다 들어오는 주인은 이미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주인 여자의 눈에는 새댁이 하고 다니는 도금이 잘된 수입품 액세서리가 모두 금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미꾸라지를 가지고 방법을 하면 도둑의 눈이 먼다고 울고 있는 나에게 하라는데 어느 할머니가 젊은 새댁이 앞날이 있으니 그런 일 하지 말고 이사를 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집을 얻을 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 집은 얻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집을 얻을 때 비어 있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처음 집 장만 할 때 폐물을 팔아 부족한 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생리를 하면 도벽이 있는 주인여자에게 나는 당하고 말았다.
 
자양동으로 첫 번째 이사를 간 곳은 한의원 하셨던 노 부부가 살고 있는 양옥집. 애가 있으면 방을 주지 않는다고 배가 부른 나는 방을 얻으러 가지 못하고 남편이 친구와 방을 얻어 이사를 하는 날 주인 할머니가 내 배를 보고 작은 소리로 애 있는 집은 주지 않으려 했는데 혼자 말처럼 하셨다. 그 말을 알아 들었던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할머니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 바둑 친구가 되어 드리고 11월에 나는 딸을 낳았다.
선을 보았을 때 남자의 나이는 스물 여덟이라서 당연히 건축과 졸업반인 줄 알고 결혼을 결정 했는데 남자는 호적에 두 살 아래로 되어 있고 군대를 갔다 와 복학을 한 학생이었다 
 
입덧을 하여 냄새가 싫은데도 간신히 반찬을 해 놓으면 학교가 가까운 응봉동 집에 과 친구 7명이 점심 도시락을 가져와 해 놓은 반찬과 다 먹고 가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딸을 낳으니 그 아이도 눈물이 많았다.  
 
딸을 낳고 마루를 거쳐 화장실을 맨발로 다니는 내 모습을 할아버지께서 보시고 산모가 맨발로 다니면 안되니 양말을 꼭 신어야 한다는 충고와 산후 조리를 못하면 후에 몸이 좋지 않다고 하셨다. 그리고, 필요한 한약이 있으면 경동 시장에서 사다 주시는데 그때 처방전이 약값 보다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이사는 부산 현장으로 첫 발령이 나 남편이 구해 놓은 방 한칸으로 이사를 갔으나 짐이 들어가지 않아 현장 여직원 집 창고에 우선 필요한 것만 남기고 짐을 맡겼으며 방을 다시 구할 때까지 살기로 하였다. 그 집은 마루에서 화장실이 연결된 일본식 집으로 밤이면 쥐가 화장실에서 부엌으로 돌아다녀 그 더러운 쥐 발자국에 소름이 끼쳐 하루도 살수 없는 집이었다.
 
회사에서 건물 완공 하면 주차장 공사를 하려고 사놓은 집으로 세 번째 이사를 하여 살다 보니 막노동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게 되었다. 일을 열심히 하면 평생 막노동 일을 한다고 시계만 보고 있는지 점심 시간과 끝나는 시간을 단 1초도 늦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산은 부동산이 없고 전봇대나 대문에 방이 있다고 써 부치기에 7개월이 된 딸을 데리고 방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단이 많은 곳이라 유모차에 딸을 태우고 방을 보려면 길 끝까지 마냥 걸어가며 다음 부록으로 올라갈 때까지 방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이와 집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네 번째 집은 여직원이 옆집을 구해 주어 이사를 하였다. 그런데 앞 집이 오래되어 나무속에 살고 있는 바퀴 벌레는 창문을 열어 놓으면 새처럼 날아 들어와 마음 놓고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주인 아저씨는 갑판장으로 배를 타 몇 달씩 집을 비우고 아주머니는 아들 둘과 딸을 키우는데 작은 아들은 아저씨가 다방 여자와 바람을 피워 낳았다고 한다. 그 아이는 손 버릇이 나빠 아저씨만 오시면 매를 맞는 천덕꾸러기였고 큰 아들과는 모양새가 달랐다.
지금은 등 푸른 생선이 좋다고 고등어가 비싸지만 1978년도에는 제일 싼 생선으로 아주머니는 아침마다 연탄불에 고등어를 소금 뿌려 굽는데 두 번째 애를 가져 입덧을 하여 견딜 수 없다고 재발 고등어 좀 굽지 말라고 부탁을 하여도 소용이 없는 몸 평수가 넓고 답답한 주인 여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부엌에 있는 유리로 된 나뭇잎 모양 접시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주인 여자가 집을 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 날 안채 부엌을 가보니 그릇이 없었고 마루에 있는 찬장에 진열되어 있는 것이 내 것이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꺼내 오는데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떨렸다.
 
그 후 서로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지냈다. 다섯 번째 대전 유천동으로 이사를 하여 1979년도 6월에 아들을 낳아 산후조리를 친정 어머니에게 부탁을 드렸지만 이민간 언니의 아들 세 살짜리를 친정 어머니가 돌보고 있어 조카를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었다.
조카는 엄마 곁을 떠나 있어 불안한 상태로 어머니가 일을 하시면 울고 따라 다녀 2주일 만에 가시게 하고 여름이니까 몸조리는 하지 않고 지냈다.
 
여섯 번째 집은 밖으로 아래층에 대문이 있고 2층에 있는 독채를 얻었는데 담 옆은 공터로 밤이면 술을 마신 남편은 담을 넘어 다니는 것이었다.
여름에는 공터에 풀이 많아 메뚜기를 잡아 딸과 볶아 먹는 재미도 있었던 집이었지만 남매가 설사를 자주 하여 어떤 날은 아들의 기저귀를 빨다 하수도가 막히는 날도 있었다.  
 
일곱 번째 이사를 한곳은 김해였으며 할머니 혼자 살면서 방을 세 놓아 생활 하시는 분이었다. 부엌에 항상 깡 보리밥이 있어 궁금해 무슨 밥인가 여쭈어 보았더니 당뇨가 심해 깡 보리밥과 쇠고기 200그램을 날마다 드신다고 하셨다.
 
여덟 번째 집은 직원이 방을 주어 잠시 머물고 마산으로 아홉 번째 이사를 하여 10개월을 살다 열 번째 울산으로 이사를 가니 현대 자동차 공장이 있어 백화점도 있고 어시장이 커서 먹을 것이 많은 도시였는데 5일 장날도 있었다.
잠시 머물다 떠났기 때문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어 외로운 생활이었으나 그곳에서는 장 날을 기다리게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항상 보따리 이삿짐이 싫었지만 열 한번째 이사는 창원이었다. 산에 둘러 싸인 신도시는 너무 조용하고 깨끗하였으며 운전을 하다 보면 아지랑이가 많아 도로가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지만 길이 한가하여 차가 잘 달리는 살고 싶은 도시였다.
 
열두 번째는 서울 가락동에 있는 원호 대상자 아파트 전세를 얻어 이사를 하고 보니 원칙은 세를 놓으면 안 되는 아파트를 모두가 불법으로 부동산이 소개를 하였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거의 불구의 몸으로 정상인 사람은 우리처럼 어떤 아파트라는 것을 모르고 세를 얻은 사람들이었다.
 
열세 번째 수원 매탄동 주공 아파트에 이사를 하였을 때는 딸이 유아원에 다니는 네 살 때이었다.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새벽 230분쯤 현장에 근무하는 반장 부인이 와서 도와 달라는데 팔목에 면도로 난도질을 하여 피를 줄줄 흘리며 서있는 모습에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남편이 현장에 청소 하는 과부와 바람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 부부는 19살에 만나 아이를 다섯 번 지운 뒤로 아이가 없고 방안에 조리를 걸어 놓은 것을 보고 저건 무언가 물었을 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해 놓았다고 한다. 너무 기가 막혀 서울역 근처에 있는 모 산부인과에 같이 가서 진찰을 받아 보니 자궁 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폐 결핵은 알고 있었지만 자궁결핵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때 치료를 받아 아들을 낳았지만 남자는 그 바람을 고치지 못해 끝내는 대구 현장에서 다방 여자와 딸을 낳아서 지금은 대학에 다닌다는 전화를 한 남자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뻔뻔스러웠다. 부인이 그 아이를 키우면서 마음 고생을 얼마나 했을까! 같은 여자 입장에서 동정이 가는 것이었다.
 
1982년도에 남편이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으로 떠나면서 목동에 새로 지은 연립을 사서 열 네 번째 이사를 하였을 때는 딸이 다섯 살, 아들이 세 살이었다.
남의 집 살이가 싫어서 돈 사백만 원을 가지고 일천칠백육십만 원짜리 집을 사는데 팔백은 20년 상환 주택부금 융자, 오백은 5년 단기 융자, 이 백은 시댁에서, 일백오십은 친구에게 사채를 은행 이자만 주기로 하고 빌려 샀지만 사채 이자 칠천 원을 주는 것이 아까워 사우디를 떠나면서 재형저축 넣은 적금을 3개월 만에 해약하여 사채를 갚았다. 목동에 물 난리가 나고 논 밭이 많았던 시절을 넘기고 딸이 고등학교 들어 갈 때까지 8년을 살았으나 연립 담이 높아서 물난리는 한번도 당하지 않았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연립이 재건축 하는 바람에 미분양 된 아파트를 사고 싶었지만 연립을 팔면 이천 만원이 부족하여 사천구백만 원 하는 아파트를 사지 못하고 열 다섯 번째 아파트 전세로 들어가 6개월을 살고 있을 때 집 주인이 세를 더 올려 달라는 경우 없는 여자를 만나 1년을 싸우다 열 여섯 번째 다른 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동안에 전세금이 올랐기 때문에 짐을 반을 버리고 작은 평수로 이사를 하는데 정말 남의 집 살이란 힘이 들었다.
남들은 전세를 들어가도 내 집처럼 오래 들 사는데 무슨 팔자인지 계약 기간을 살아본 집이 없었다.
 
열 일곱 번째 이사는 연립을 재건축 하면서 남동생 명의로 고척동에 아파트를 사 8년을 살고 목동에 재건축한 아파트를 전세를 주었는데 이사를 간다 하여 살고 있는 집을 팔았지만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일년을 살게 된 집이 열 여덟 번째 이사였다.
그 집을 살면서 전철이 가까워 교통은 편하였지만 매연 때문에 마루를 닦아도 발이 까맣게 되어 맨발로 다닐 수가 없어 걸레질만 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열 아홉 번째 목동 집으로 이사하여 3년을 살았을 때 옆 동에 사는 할머니를 차에 치는 일이 생겨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동생이 계약을 해 놓았다 하여도 싫어서 더 급매로 팔았는지도 모른다. 목동은 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 일방 통행으로 설계를 했다고 한다. 캐나다 같은 경우는 아파트 높은 층에서 길을 내려다 보면 바둑판을 보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질서 없이 작은 땅만 있어도 집을 짓기 때문에 맞지 않는 도로이다.
 
5년에 이사를 열 네 번 한 집이 또 있을까! 건축쟁이 마누라가 그래도 그 시절이 금 값처럼 좋았던 시절이라면 아무도 이해를 못할 것이다.
남매가 학교를 들어 가면서 현장을 따라 다닐 수가 없어 주말 부부로 아니면 2주간 남편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결혼 생활 36년에 아마도 남편과 같이 산 세월은 넉넉히 18년이 될 것이며 밤이면 혼자 독수공방 하는 세월이 너무 많았다.

이순선   12-08-10 00:15
    
허향심님! 수차례의 이사에서 생긴 에피소드들 소상하게 잘도 정리 해놨어요.
참으로 이사하기가 얼마나 힘든일인데, 그시절엔 포장이사도 없었지요.
집없는 설움을 수십번씩 겪어오는 길엔 여자의 일생이 들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애쓰셨어요. 
그렇게 고생하며 키운자식의 자식까지 돌보고 계시니 향심언니는 훌륭한 어머니이시며 할머니이십니다.
또한 독수공방도 참고 견디신 훌륭한 아내이기도 합니다.
손자를 키우면서도 글쓰기 취미생활에 푹빠진  그 아름다운 열정에  마음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우리일산반의 벗들은 그대의 글에 주목하며 발전해가는 모습을 지켜 보렵니다.
모두들 그대를 사랑하기에!...
문영일   12-08-10 11:38
    
지나고 보면 모두 애틋한 추억들 . 그게 세상사.
서울에 사는 사람들, 평균 2년에 한번씩 이사한다는 통계가 잡힌 해도 있었습니다. 물론 '사고 팔면' 돈 버는 세월일때이지만. 그렇게 해서 돈 번 사람들도 많았지요.  허 향신님은 부군 따라 건축현장을 다니시려고 이사을 그렇게 많이 하시면서 '갖은 풍상'을 겪으신것 같은데 그게 앞으로의 삶에 큰 미쳔이 되지 않겠습니까?
열네번의 이사를 모두 기억하시며 쓰신 글이 재미있습니다. 건필 하세요.
일산김정희   12-08-11 08:09
    
요즘 이사 가는 사람이 부러워서 나도 가고 싶어를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는데....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과는 다른 풍경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안정연   12-08-11 15:45
    
허향심님께선 이미 이사의 달인이 되셨습니다.
우리 세데에 이사 횟수 따져 보면 아마도 서민들은
열다섯번은 넉넉히 될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님의 이사하는 고통을 조금은 알것 같습니다.
올 삼복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짠 땀방울의 소금물에
눈을 절여 가면서 이사를 하고 나니 오늘은 온몸이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늘 열심히 글 쓰시는 그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좋은글 많이 쓰세요.
김성희   12-08-12 00:09
    
글에서 지나온 삶의 노고들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맺어진 인연들도 함께요.
건축현장에서 땀흘리신 부군과 그 뒷바라지 한 허선생님의 모습에
존경을 표합니다.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부탁합니다.
한지황   12-08-14 20:00
    
허향심님의 삶이 이사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세히 녹아 있는 글,  진솔함이 느껴지는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사를 통해 님의 인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니
인생은 나그네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르네요.
짧게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살면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게 인생이라면
결국 지구라는 공간에서 한평생 살다가 또 다른 세계로 이사를 가야함이 우리 인간들의 운명이겠지요.
많은 이사 경험을 통해 남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과 환경을 접하신 님에게 글쓰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앞으로도 그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 좋은 글 많이 빚어내시리라 기대합니다.
오윤정   12-08-14 23:17
    
어떻게 오래 지난 일들을 세심히 다 기억하시는지 신기합니다.
새로운 터전에서의 인연에서 시대의 모습도 읽히네요.
선생님 열심히 글 쓰시는 모습 감탄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쓰셔서 저희들의 귀감이 되어주세요.
이은숙   12-08-15 23:48
    
많이 힘들고 고생스러운 이사였을 법도 한데
 그때가 가장 금값 같았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이지  믿음이지 싶었습니다. 
깨알같은 애피소드가 재미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허향심   12-08-24 20:23
    
글을 처음 올려서 댓글이 늦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 합니다. 많이 도와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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