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모이기만 하면 떠나 자고들 했다. 그럼에도
5월이 되어서야 각자의 시간을 조정하게 되었다. 목적지는
안면도이다. 이번 여행길은 나를 포함하여 동행이 3명이다. 오랜 동안 사무직 근무로 보통사람인 소심한 나, 유명 건설회사에서
세상을 누볐던 토목 전문가 사나이 A, 사업으로 성공하고 잘 못된 거래로 잠시 혼란스러운 상태인 최신정보와
첨단 유행 통 B, 이렇게 셋이다. 우리가 친구가 된 것은 1년 반 전의 일이 계기가 되었다.
재작년 가을 나는 회사의 구조조정 추진 결정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직장을 떠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과 같은 무서운 일이었다.
더구나 한 직장만 30여 년 간 다닌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여행사진 과정 개강 광고를 보았다. 바로
신청하였다. 잠시라도 마음의 여유가 필요 하였다. 강의 첫날
나는 깜짝 놀랐다. 남녀노소 60여명이 모였다. 나같은 중년의 또래들이 대부분이겠거니 한 나의 생각은 빗나갔다. 일주일에
단 하루 저녁 3시간의 강의만을 위하여 부산, 대구, 대전에서 왔다는 급우들의 열정에 나의 가슴이 뛰었다. 3개월의 수업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과는 무척 다른 길도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불확실한 앞날을
꿈과 열정으로 가득 채우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급우들을 매주 만나는 것만으로 많은 위안과 반성이 되었다. 조금은
유연한 마음으로 나의 퇴사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강원도로 과정 졸업 여행을 갔다. 소심하여 수업 기간 내내 눈 인사만 나누던 급우들 중 나의 동갑내기가 두 명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술의 힘이 컸다. 더구나 그들 둘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인지도 서로
모르고 과정을 마쳤다. 게다가 셋은 서울이 고향이다. 나는
종로구 필운동, 둘은 마포구 공덕동이다. 셋 모두 가족들이
대대로 서울을 벗어나 살아 본 적이 없다.
만난 지 1년여가 되었어도 술이나 돌아야
‘아무개야’ 하고 부르는 우리의 관계는 아직도 조심스럽다. 안면도로 출발부터 버스 자리 앉기, 점심식당 고르기로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긴 세월을 모르고 살았으니 당연하기도 하다. 태안
해변 길은 안면도 북단 학암포에서 남단 영목항까지 총 97km의 7개
코스이다. 우리는 중간 3개 코스를 2박3일간 걸었다. 코스
대부분이 해변 길로 모래바람이 거칠어 한발 내딛기도 어렵다. 썰물로 넓어진 해변 길은 사막을 보는 듯
하였다. 우리 셋은 자연스럽게 떨어져서 일렬로 걷게 되었다. 다져진
체력과 극한 환경에 적응력 높은 A가 앞장을 섰다. 내가
중간에 서고 생각이 많은 B가 뒤에서 걸었다. 앞뒤로 간격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속도를 늦추어 B를 행렬
가운데로 걷게 하였다. 심신이 피곤한 친구 B에게 격려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만난 지 얼마 안된 새 친구이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나에게 숨김없이 알린 B가 고맙다. 친구로서 인증 받은 기분이다. 산속 숲길로 들어섰다. 바람 막이 해송이 멋지다. 숲길 바로 밖 해변에는 아직도 바람이 한가득인데 마치 집안 거실에 들어 선 듯 하다.
자연의 조화에 감탄한다. 바람에 지친 우리는 양지 바른 곳에 누워 버렸다. B가 은방울자매의 ‘마포 종점’을
틀었다. 마포 출신의 애창곡이란다. A가 장단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덩달아 나와 B도 손을 잡았다. 빙글빙글
돌았다. 웃음이 터졌다. 실컷 웃고 춤을 추었다. 한 순간 마음의 짐이 내려지는 상큼한 기분이 들었다. 신나게 어울렸다. 지금도 그때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 크게 웃게 된다. 저녁 노을이
지면서 1일차 도보여행도 마무리 되었다. 종착지 안면도 백사장항에
도착하였다. 1일차 하루 종일 A는 우리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었고 B는 음악 담당으로 나는 A와 B를 돌보는 즐거움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친구와의 진정한 우정은 성장이 더딘 나무와 같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우리의 우정은 쑥쑥 자랄 것 같았다.
백사장항 입구에 있는 인도교는 꽃게 다리라 불린다.
꽃게를 형상화한 재미있는 모양이다. 포구에는 온통 횟집뿐 이어서 다른 종류의 메뉴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나는 회를 포함한 날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선은
생물을 직접 잡아야 한다는 것이 께름직 하고 날것의 물컹한 식감을 즐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
고객과 갔던 고급 일식 집에서 자신의 몸을 바치고 접시에 누워 벌렁거리던 그 횟감의 입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랜
친구들과는 달리 이번에 동행한 새 친구들은 아직도 서로 모르는 것 천지이다. 식성도 그 중 하나이다. 또 서로 눈치껏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생선회가 나왔다. 우리는 첫 동행 여행을 축하 하였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젓가락질이
시원치 않다. 접시에 가지런히 고급스럽게 놓인 회는 그대로이다. 반찬
접시만 바쁘다. 그날 밤 세 사람 모두 깡 술로 무장해제 되었다. 사실
우리 셋은 모두 날것과 회를 좋아하지 않는 식성을 갖고 있었다. 각자 의사표시를 미리 했으면 만족도
높은 대안을 찾았을 것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훼방꾼이 안 되려고 눈치만 본 것이다. 하루 저녁
식사로 거액의 여행경비를 낭비한 것은 안된 일이었지만, 오랜 우정관계로 오는 권태기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새 친구들의 풋풋하고 정 가득한 마음씨가 좋았다. 소년시절로 돌아간 기분도 살짝 들었다.
나이, 고향, 식성까지 맞추었으니 무엇을 더 찾을 수 있을지 남은 여정이 흥미롭다. 성격
꼼꼼한 사람, 끼가 넘치고 활력을 주는 사람, 첨단의 정보와
유행을 즐기는 사람이 제 각각의 특징과 공통점으로 새 친구가 되자고 모였으니 우정나무 묘목으로는 알맞다 생각한다.
우정의 폭풍 성장을 위하여 더 대화하고 탈출을 자주 모의할 일이다. 2일차에는 주로 산길을
걸었다. 첫날 보다 더 말과 웃음이 많아졌고 각자가 좋아하는 먹거리를 찾아 즐기게 되었다. 점심식사로는 푹 익은 석박지꽃게탕을 저녁에는 삼겹살을 먹었다.
(석박지꽃게탕: 배추와 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한데 섞어서 젓국으로 버무려 담는 김치인 석박지, 호박, 꽃게로 요리한 태안의 향토음식)
친구를 생각해 본다. 활동 범위가
넓었던 시절을 지나서 돌아 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지인과 친구를 혼돈하며 오랜 시간을 살아온 것 같다. 친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금 나에게는 아는 사람은 많은데 진정한 친구는 몇이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한 위인은 ‘친구가 많다는 것은 친구가 전혀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