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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령 나그네    
글쓴이 : 장영수    15-07-22 10:40    조회 : 5,883

이화령 나그네

장영수

 

왜 이 길을 걷는가 물으신다면 대답이 궁합니다. 사실 저도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 이유를 찾고자 걷는다고 답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여유 시간이 생긴 요즈음 걸으면서 문제들을 조금씩 풀어 가는 것 같습니다. 빠른 교통수단으로 오고 가며 보지 못했던 것들을 걷기를 통해 하나, , 보게 됩니다. 값진 경험입니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연결 통로 중 하나인 이화령 길을 걸었습니다.  출발지의 시외버스 터미널은 적막강산 입니다. 사람 그림자도 없습니다. 알록달록한 간판이 늘어선 면소재지는 영화 촬영소의 80년대 세트장을 닮았습니다. 프레임을 통해 본 정지 장면인 듯 합니다. 흔들리는 잎사귀와 날갯짓하는 새들이 현재임을 말해주는 소품들 입니다. 현대식 휴양지에 밀려나 지금은 온천지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수안보 입니다. 해발 548m 이화령을 넘어 문경새재까지 26.51km 도보여행의 출발점 입니다.

 

후끈한 열기 속으로 첫발을 내 딛습니다. 식구들의 허락을 구하여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숲에서 부는 바람이 의외로 선선합니다. 가로수 그늘 풍경이 싱그럽습니다. 서울은 35도라 합니다. 환경오염이 덜된 시골이 더 시원합니다. 환경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홀로 걷기의 재미 중 으뜸은 세상만물과의 대화입니다. 그냥 혼자서 중얼거린 것이 대화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 나비, , 젓소, , 개울물, 하늘과 심지어 아스팔트까지 모두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보여행의 소중한 길동무들이고 힘들이지 않고 걷는 요령입니다.

여름 들꽃들이 한창입니다. ‘어쩜 색이 이렇게 고운지?’ ‘언제부터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더운데 물은 먹었는지?’ ‘아스팔트야 나를 위해 고생이 많네. 고마우이.’ 길가 여기저기에서 아름답게 핀 꽃들이 나의 질문에 응답합니다. 땡볕 아래 숨이 차오르지만 대화로 열기를 식힙니다. 주변의 사물과 대화를 시도해 보십시오. 혼자일 때 좋습니다. 외로움이 사그러듭니다. 위로가 됩니다. 특히 소리 내어 대화하면 효과는 더 좋습니다. 힘든 시간을 이겨나가는 한가지 요령입니다.

가뭄임에도 농부들의 헌신적인 노고로 논에 연녹색 양탄자가 깔렸습니다. 논바닥의 물이 넘쳐 수로로 떨어지며 발걸음과 장단을 맞춥니다. ‘또로록 주르륵 똑똑’ 넘쳐 흐르는 물 속에서 농부의 행복한 미소가 보이는 듯합니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은 얼굴 입니다. 길동무들과의 대화는 하릴없이 계속 됩니다.

걸으면 얻는 깨달음은 또 있었습니다. 걷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목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이미 보이는 것은 곧 가까이 다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표는 저기 돌아가는 길 모퉁이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설렘이 생기고 각고의 노력과 준비로 달성 할 수 있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인생의 길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목표를 찾기 위한 새로운 용기가 솟아 오릅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그 어느 길 위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생각이 가득해 집니다.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울 즈음 길 모퉁이를 돌자 잔디 정원과 쉼터가 나옵니다. 잡초 하나 없는 너른 잔디밭이 정갈합니다. 주인장의 성품이 보입니다.  이른 시간이라 준비가 안되어 주문한 라면을 반쯤 먹었을 때 주인장이 밥 한 그릇을 슬쩍 놓고 갑니다. 혹시 안쓰럽게 보였는지 당황스럽습니다. 감사의 눈인사를 보내고 밥을 말아 먹으며 생각합니다. 내 살아오는 동안 누구에게 슬그머니 따스한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있었는지. 주인장은 감성 어린 마음씨로 내게 작은 행복 나눔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덧 이번 걷기의 최대 이벤트인 이화령 길에 들어섭니다. 사물과의 대화도 시들해 질 때 라디오를 켭니다. ‘내가 만일 시인 이라면’ 하는 노래가 들립니다. ‘내가 만일’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돌을 던집니다. ‘만일 옛일들을 다시 새로 할 수 있다면 어떨까’하는 공상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길동무를 찾았습니다.

한세기 인생에서 절반을 살았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연속된 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잘 한일은 훈장처럼 가슴에서 번쩍거리고, 후회되고 부끄러운 일은 응어리가 되어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슴에 묻어 놓았습니다. 공상과 상상은 모두 현실에 없는 것을 생각하지만 상상은 현실화 하려는 노력이 포함되는 것이고 공상은 그저 허상일 뿐이라고 합니다. 나의 과거사는 다시 되돌리거나 현실화 할 수는 없으니 공상을 해 봅니다. 당연히 헛된 시간 낭비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공상은 사상의 공휴일’이라는 말처럼 인생의 중간 지점에 와 있는 지금 주말 오후 휴식처럼 느긋하게 공상을 하며 걸어 보았습니다. 만일 20대 초반으로 돌아 갈 수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 왔을까, 군대를 마치고 입사한 직장이 다른 곳이었다면, 더 원초적으로는 여자로 태어 났다면, 59세 이른 연세에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존해 계신다면, 내 삶의 빈 공간을 가득 넘치도록 공상으로 채워 봅니다. 내 삶의 중간 성적표인 현재와 공상이 잠시 주는 위안과 즐거움의 가치 중 어느 것이 더 나을지 비교도 해 봅니다. 결론은 지금이 최선입니다. 다시 현실과 부딪쳐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다 더 멋지고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화령 길은 고개를 관통하는 터널들이 생기면서 자전거와 도보여행자의 길이 되었습니다. 고갯길 바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정상까지 남은 거리표시가 있습니다. 정상까지 4.6km, 3.8km 3.2km .. 5시간째 걸어 발걸음이 무거운데 길바닥의 거리표시까지 조바심을 내게 합니다. 어떤 작자가 만들었는지 혼내주고 싶습니다. 일전에 3천배에 도전했다가 1200배에서 전신마비로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100배 마다 셈을 하는 성냥개비가 문제이었습니다. 3천배에 해당되는 성냥 30개비를 몽땅 놓고 100배 마다 하나씩 뺐어야 했는데 반대로 하다 보니 몇 시간이 지나도 열 개비도 되지 않는 성냥개비에 몸과 마음이 굳어 버렸습니다.  성냥개비에 항복 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생각으로 거리표시를 다시 보기로 하였습니다. 줄어드는 거리표시에 기운이 납니다. 어떤 작자가 만들었는지 칭찬 해주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문제는 결국 내 마음으로 풀 수 있음을 새삼 확인합니다. 이화령 정상에서 보는 산들과 계곡위로 떨어지는 햇살 풍경은 장관입니다. 정상에서 맛보는 달콤함으로 가슴 속 아픈 응어리를 조금씩 달래 봅니다. 편안한 내리막 길이 시작 됩니다. 어려운 시련을 잘 이겨내자 적절한 보상이 있는 인생길과 꼭 닮았습니다. 저녁 어둠 속에 목적지인 문경새재에 도착 하였습니다.

 

도보여행에는 특별한 목적과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만일 걸으면서 달성해야 하는 것들이 계획되어 있다면 그것은 고행길과 다를 바가 없다 생각합니다. 터덜터덜 가다 보니 순간의 즐거움과 내려놓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가장 느린 여행인 걷기를 통하여 빠른 속도의 가속으로 멈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잠시 정지시켜 만성적인 어지럼증을 치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걸어야만 오는 행복과 보이는 것들로 당신과 함께 행복 나눔을 시작하렵니다.


김미원   15-07-22 19:42
    
와~
제목이 멋지네요.
매인 것 없이 구름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은 저의 눈을 잡아끕니다.
15년쯤 전인가, 식구들과 문경새재 어느 주막에서 울려퍼지던
장사익의 쥐어뜯는 노래가 이 글을 읽으며 생각났습니다.

방하착의 도를 계속 보여주셔요.
장영수   15-07-22 22:13
    
고맙습니다. 장사익씨의 노래를 찾아 봐야 하겠네요. 다음 여정중 이화령 꼭대기에서 듣도록 준비 하겠습니다.
김혜정   15-07-23 10:09
    
성냥개비에 항복한 최초의 인간 장영수.
그 장영수님이 결코 작아보이지 않음은 어쩐 일일까요?
"글쓰기가 처음일 리 없다" " 아니다. 타고난 재주, 천상 글쟁이다."
우리의 설전을 일으키신 장본인.
어느 것이면 어떻습니까
모두가 칭찬인걸요
벌써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장영수   15-07-23 14:54
    
경쾌하고 정확한 멘트로  길을 열어 주셔서 항상 감사드립니다.
 사실 3박4일이 저의 여러 별명중 하나 입니다. 첫째날에 성필선 쌤께서 369 말씀하실 때 심쿵 했습니다.
 이번에는 용두사미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초긴장하고 있습니다. ^^
신선숙   15-07-30 18:23
    
풀과 개울물과도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는 나그네가 곧 도를 통할것같군요.
차분히 나 자신도 따라 걷고 있는듯합니다.
건필하십시요.
홍성희   15-08-01 23:19
    
장선생님 글속엔 소소한 일상과 깊은 사유가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읽다보면 장면장면이 다큐멘터리 보듯 상상됩니다..
퇴직 시기가 비슷해서인지 요즘 제가 느끼는 생각인 듯
공감돼서 더 좋았습니다.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장영수   15-08-02 15:07
    
예 감사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느리게 살아가는 것이 매우 좋은 것임을 느끼고 얻어 왔습니다. 퇴직이 주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더 많지만 새로운 시작에 더 집중하고 감사하며 최면을 걸어 지내려 합니다. 무더위에 건강 유념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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