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에 걸린 공주님
장 영 수
“오늘이 몇 월 며칠 이지요?” “지금 계절이 무엇 입니까? “2 더하기 5는 얼마지요?” “10 빼기 3은……” “어제 저녁은 무엇을 드셨나요?” “오늘은 무엇을 타고 오셨어요?” 나도 얼핏 생각이 안 나는데 무슨 이런 질문을 하는가 당황스럽다. “뭐예요? 내가 누구인지 알기나 해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공주는 날카롭게 의사에게 쏘아 붙였다.
한밤중 공주의 세상이 열린다. 방문이 열리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도둑이야! 백 만원을 훔쳐 갔어”
“아버지 오시면 어떡해? 아버지가 맡기신 것인데” 공주는
가수면 상태로 비틀거리며 밤마다 운다. 어김없이 마법에 걸린다. “정신
차리세요. 정말 왜 이래요?” “저예요. 정신 차려 보세요” “저
못 살겠어요. 정말!” 공주 안의 또 다른 이중 인간이 일그러진
표정과 평소와 완전히 다른 저음의 목소리로 말한다. “야! 이
미친놈아 못 살겠으면 내 집에서 당장 나가!” “니 놈들을 모두 다 없애 버릴 테다!” 마법에 걸린 공주는 괴기스럽게 소리쳤다.
아침이 되면 공주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식사를 한다. “에이, 김치는 왜 이리 매워. 국은 짜고.”
모시기 어려운 시어머니의 타박은 여전하다. “어젯밤이 생각 나세요? 막 소리 치고 우셨다고요.” ”누가? 내가? 그럴 리가?” 공주는 방문을 쾅 닫으며 들어 가신다. 해가
뜨면서 잠자리에 드신다. 마법이 풀린다. 내 엄마가 돌아
왔다.
엄마는 공주로
자라 셨단다.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제3자의 전달어법으로
표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3남2녀 중 늦둥이 막내인
엄마는 유독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여 남매 중 유일하게 유치원부터 교육을 받았단다. 지금으로부터
89년 전 당시에는
사회 여건상 유치원 교육이 보편화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니인 큰 이모는 중등학교를 마쳤지만 동생인
엄마는 고등학교까지 지원해 주셨단다. 골목 어귀부터 막둥이의 이름을 부르며 오시는 외할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막내를 위한 간식이 들려 있었단다. 형제간 옷 대물림은 당연한 시절임에도 막내딸만은 새 옷을 입고
자랐단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언니인 큰 이모와 양순하기 그지없는 나의 아버지가 공주님을 모셨다. 큰 이모는 집에 오면 동생을 위하여 당연히 식사 준비를 하셨고 아버지는 단 한번도 엄마의 뜻을 거역하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공주로서 주변사람들을 좌지우지하며 살았다. 이세상
사람 모두는 당신이 거두어야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생각하였다.
아버지가 59세에 돌아 가셨다. 우리는 하루 아침에 언덕을 잃었다. 식구들과 함께한 그날의 아침밥상이 아버지와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이부자리
채로 응급실 바닥에 계시던 아버지의 등 밑에 손을 넣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따뜻했다. 사망선고를 하는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무엇이라도 다시 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의 체온은 내 손에 그대로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추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공주의 생각이었는지 장례식 내내 아무도 엄마의 우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떠나시기 전에 여러 사람들과 점심을 하고 테니스를 치고 오래 못 만난 많은 친구분들과 전화도 하셨단다. 문상 오신 분들이 전해주는 떠나시기 전 일주일 동안 아버지의 행적은 과학과 상식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인간의
직관과 그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운명의 시계를 떠 올리게 하였다. ‘어머니를 산에 뿌린 자식이 납골당에
들어 갈 수 없다.’는 엄마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신 할머님처럼 들판에 잠드셨다.
엄마는 장례를
마치고 집에 오자 마자 옷을 갈아 입자고 했다. 미국 유학 중이라 급히 되돌아가야 하는 형을 위하여
외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그러하고 고생하는 형을 위한 자리를 마련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공주의 생각을 꺾지는 못하였다. 엄마는 “큰아들 파이팅!”을 건배 하였다. 검은색
옷을 입은 식구들의 사진 속에 공주는 환하게 웃고 있다. 엄마는 본인이 모든 일을 주도 해야 하는 공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엄마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 보낸 바로 그날 먼 길 떠나는 자식을 위해 건배해야 하는 공주의 마음은 다시는 맞출 수 없는 퍼즐 조각이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혼자가 된 엄마는 모든 상황에 의연히 대처하는 듯 보였다. 평일은
신문사 문화센터의 인문학 수업에 열중하시고 남대문 도깨비 시장을 애용하며
주말이 되면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전국으로 등산을 다녔다. 어느 일요일 저녁 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똑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엄마가 있었다.
등산을 마치고 갑자기 기력이 없어 쓰러졌다는 것이다. 엄마는 어떤 일이든지 대열의 선두에
서야 하고 사람들에게 본인의 허점을 숨기려 하였다. 대중의 눈을 의식하며 평생을 살아온 공주는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 엄마의 경대에는 ‘나를 따라올
자는 이세상에 없다.’라고 메모가 붙어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
흩어진 퍼즐 조각을 찾아 맞춰 보려 하였지만 역부족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와의 대화는 점점
어렵게 되었다.
이제 가정의 평화는
사라졌다. 평균 3시간 이상을 자지 못하는 나는 코피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장남 아닌 장남이 되어 20년째 시어머니를 모시는
아내의 얼굴은 점점 검게 변하고 있었다. 병원 자체를 강력히 거부하는 엄마를 설득하여 건강검진을 핑계로
진찰을 받았다. 오늘이 며칠이고 계절이 언제인지,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하여 대답 할 수는 없었지만 회계 업무를 오래 하신 엄마는 산수 문제에서 만점을 받아 의사의 박수를 받았다. 공주는 활짝 웃었다. “알츠하이머 입니다.” 요양 3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중
보안시설 뒤 철창 속 정신병동에 엄마가 입원하였다. 절망이었다. 입원
후 호전 되기는커녕 점점 혼미한 상태가 계속 되었다. 이제 결정할 시간이 왔다. 가족회의를 소집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불효자는 용서를 빌고 빌었다.
1월의 시골길을 마법에 걸린 공주님과 함께 달린다. 초행길에 눈이 내린다. 이 세상에서 슬프게 내리는 눈은 그때 처음 보았다. 함께 몸은 있었고
마음은 거기에 없었다. 계속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요양원에 도착할 때까지 부스럭거리는 엄마의 과자 봉지 소리 이외에 누구도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6개월간 아내와 함께 수도권의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찾아 다녔다. 어느 요양원 원장의 눈깔사탕만한 다이아몬드
반지와 새빨간 입술은 허위와 불신을 말해 주었다. 어떤 곳은 넓은 홀에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휠체어에
묶여 2열로 앉아있는 인격체들을 보며 억압과 인권상실에 화가 치밀었다.
이중 시건 장치를 거쳐 들어 간 요양병원의 환자들은 이미 이세상의 생명이라 할 수 없어 눈물만 흘렀다.
용인에 있는 한 요양원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최선인가?
“내가 왜 이런 곳에 와야 하지? 말해
봐!” “내가 누구인데.” “여보세요! 난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에요. 저리 비켜요!” “미친 노~옴~.” 요양원 로비에서 엄마는 소리치기 시작하였다. 엄마의 말에 나는 미칠 것 같았다. 휘청거렸다. 원장이 말했다. “저희들이 잘 할 터이니 걱정 마시고 저기 뒷문으로
떠나세요.” “그리고 힘드실 줄은 잘 압니다만, 앞으로 2주일 동안 오지 마십시오. 매일 저녁 상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요양원 주차장에 마냥 앉아 있었다. 간간이 소리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용서해 주셔요.’
1월의 그날, 눈은 따스한 생명과 끈끈한 인연을 거부 하듯 차갑게 검은
눈이 되어 하루 종일 세차게 내렸다. 엄마와 나의 추억 조각들이 눈꽃으로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아팠다. 나는 눈이 그만 멈춰 엄마와 나의 추억 조각이 조금이라도
남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우리는 매주 종교행사를
한다. 엄마와 면회 및 점심 식사가 행사의 프로그램이다. 요양원에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나 아내에게 제안을 하였다. 수많은 세월 동안 유별난 공주인 시어머니에게 받은 상처투성이인
아내에게는 매우 미안 했지만 매주 엄마를 면회하고 한끼의 식사 제공을 부탁하였다. “20년을 매일 모셨는데
매주 한번 서너 시간 해 봐야 일년이면 일주일 정도 시간이니 부탁해요. 종교행사로 생각 합시다.” 아내는 망설임도 없이 그리하자 말했다.
엄마가 요양원에 가신지 4년이 되었지만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아내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난 4년간 종교행사를
단 한 주도 거르지 않는 아내는 은인이다. 엄마는 피부와 혈색이 맑게 되어 신체적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오늘도 공주님을 위하여 고기를 굽고 호박전을 부친다. 나는 고마움에
주방 보조 허수아비로 서 있다. 아내는 공주님이 음식을 흘리면 닦아 주고 용변을 돕고 미용서비스도 제공한다.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신 장모님께 사위 노릇 재대로 못하여 아내와 장모님께 미안하다.
“아저씨,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수는 어디 갔나?”
‘엄마! 오늘처럼 잘 드시고
오래오래 계셔 주세요. 아저씨, 아줌마는 다음주에 또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