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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에 날개를 달고자 ( 자기소개서 )    
글쓴이 : 송명실    15-11-24 16:47    조회 : 5,695
‘암입니다.’
차트지 너머 의사의 나지막한 말이 조심스러웠으나 왜 이리 무겁고 차갑게만 들리는지 저승사자의 소리처럼 멀고 무겁게 울려왔고 그건 고통을 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군산에 계시던 친정엄마를 서울로 모셔와 간병한지 어느덧 8년. 엄마가 돌아가실까 무섭고 두려웠다. ‘어떡하지?’ 생각 만해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혈하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꼼짝없이 갇힌 것이다. 슬픔이 커지니 두려움이 됐고 두려움은 공포가 되었다. 밝고 쾌활한 성격이지만 밤이면 외로움과 슬픔이 눈물 되어 베갯잇을 흥건히 적셨다. 가슴이 갑갑하게 조여 오면 모로 누워 핸드폰 메모장에 손끝으로 마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이제, 하늘이 어머니 고통을 거둬 가신지 1년 하고도 7개월이 되어간다. 문득 엄마 생각나면 습관처럼 메모장 찾아가 일상을 끼적거려 보기도 하고, 남편에게 “내 글 어때?” 평을 청해 보지만 칭찬과 격려는 비껴가고 ‘독서만한 스승이 없다’는 말로 일축 당한다. ‘어설픈 자랑이었나?’ 민망해서 웃고 만다.
글쓰기를 어디서 배울까? 부족한 독서량을 어디 가서 찾지? 진즉 책 좀 읽을 걸, 뒤늦게 아쉬운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1987년, 나의 진로는 두 갈래 길에 서 있었다. 미대 졸업전시회와 사은회가 몇 달 남지 않았을 때 이다. 운 좋게 학과 교수님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이 열려 뛸 듯이 기뻤다. 기쁨도 잠시 ‘여자는 많이 배우면 팔자가 사나워 진다’는 아버지의 얼토당토않은 반대로 미국 유학이 좌절되었다. 깊은 상실과 자괴감으로 “그림 그려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성격이 급한 건지 의욕이 앞선 건지 졸업도 하기 전에 작업실 겸 화실을 차렸고, 취업 걱정 없이 졸업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미술학원을 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봄 햇살이 유난히 좋은 어느 날 작업실에서 한가롭게 신문을 넘기는데 ‘어! 이게 뭐지?’ 스치듯 모퉁이 광고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패션 코디네이트’ 작은 글씨가 어찌나 크고 또렷하게 보이던지 운명이 다가오면 이런 것일까? 가슴은 두근두근 눈동자까지 콩닥거렸고, 마음은 저 멀리 요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삶의 중심에 여동생이 끼여 있었다.
본인 실력은 외면한 채 입버릇처럼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하며 학교 다니기 싫어하더니 4학년 올라가자마자 항공사 승무원이 되었다. 졸업까지 남은 출석은 학과 시험으로 대체해 2마리 토끼를 다잡은 동생이 때 맞춰 집에 내려왔다. 만나면 얼마나 좋은지 손을 꼭 잡고 수다를 떨었고 밤 새워 실타래 풀듯 끊임없이 키득거렸다. 이 말 저 말 끝에 ‘일본에서는 전문직 패션코디네이터가 있다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없데’ ‘언니가 하고 싶은 일을 알아봐.’ ‘아빠가 시집가라 반대하면 어쩌지?’ ‘걱정 마 내가 도울게’ 일의 방향이 잡히자 속도가 붙었다. 마침 미술학원을 한다는 후배가 있어 성급히 인수 시킨 후 가방에 옷 몇 가지 넣고 서울로 올라왔다.
동생은 김포 공항 근처에서 자취했는데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말자며 언니 학원비를 스스로 지원해 주었고 국제선 비행이면 선물과 때론 용돈까지 주었다. 동생이 후원자가 돼 주었어도 왜 그렇게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지 ‘돈 벌어 빚 갚아야지’하는 마음이 굳기도전에 1년이 훌쩍 지나갔다. 지금은 이자가 너무 불어 갚을 수도 없고 내 방식대로 ‘고맙다’를 ‘사랑 한다’로 바꿔 사랑해 을 연발하며 만나고 있다. 사랑만한 가치가 어디 있을까? 평생 헌신하는 마음으로 오순도순 잘 지내리라.
취업의 고민과 어려움은 누구든 피해 갈수 없지만, 복장학원 수료 1달 만에 서초동에 있는 패션회사 디자이너로 취직을 했다. 기쁨도 잠시, 말이 디자이너지 신입사원에게는 단순한 가위질과 잔심부름만 돌아왔다. “내가 이런 일 하려고 디자인 공부했나?” 꿈꿨던 일과 동떨어진 현실에 상실감이 컸다. 천에 가위질이 거듭될수록 디자이너의 꿈도 천과 함께 조금씩 잘려나갔고 1달 후 월급 타는 재미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철없던 시절 이야기라 웃음이 나온다. 누가 처음부터 사회 초년생에게 디자인을 맡기겠는가?
‘어서 오세요’ 또 다른 문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한텐 명분도 없고 주변엔 고민 상담할 친구나 선후배도 없어 사회초년생의 해프닝은 계속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유레카가 찾아왔다. 간절하면 통한다. 배짱 좋게 패션잡지사에 전화해 설득력 있게 나를 소개했다. 기자에게 거래처까지 물어보니‘전화로 거래처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다.’진정성이 통했는지 전화번호 2곳을 알려줬고 이를 계기로 잡지사, 광고 대행사, 프로덕션 등 지면이나 영상에서 모델 옷을 담당하는 패션 코디네이터 일을 하게 되었다.
산 넘어 산이라 했던가? 광고 현장일이 그리 녹녹치 않았다. 일을 하다 보니 복장학원 1년과 의상학과 4년의 공백은 실력으로 차이가 났다. 남모르게 어깨 너머 슬금슬금 배우면서 “의류학과 대학원 갈까?” 고민했고 두 번째 가방을 꾸렸다. 이번엔 폼 나게 비행기를 타고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공부를 하기위해 이태리 밀라노에 있는‘에스모다’로 날아갔고 전공이 서양화라 어렵지 않게 과정을 속성으로 마친 후 서울로 돌아왔다.
20대 후반부터 코디네이터로 현장일과 교육 강사, 영어.미술학원 원장 등 최근까지 문화센터 강사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맑은 하늘을 보면 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 길을 내고자 그림 그리는 일 외에 글을 쓰고 선보이는 일을 만들었다. 호기심과 답답함을 달래고자 어느 날 문화센터 강좌에 덜컥 등록을 했다. 문자에 날개를 달아 마음을 지면에 기록하는 행위예술인데 개인의 은밀한 낙서 같은 메모가 공개 글쓰기로 확대되었다. ‘수필반이 어디예요?’ ‘복도 끝 오른쪽 강의실입니다.’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니 교수님과 회원들이 계시고 첫 시간부터 지각해서 회원들 자기소개가 다 끝난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 신입생은 나를 포함해 2명뿐이었고 거의 다 이미 등단한 작가들이었다. ‘함께 수업을 받아도 될까? 발을 잘못 들였다. 자신 없으니 나가지 말자’ 한 주 한 주 도망치고 등 떠밀듯 4주 출석하니, 벌써 한 달이 휙 지났다. 봄 학기에 자기소개서를 써냈지만, 가을학기가 다 가도록 미적대다가 이제야 한국산문 홈페이지에 인사드림은 천성에 꼭꼭 숨어사는 내 게으름과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박유향   15-12-17 12:46
    
송샘님 자기소개서를 올리셨군요. 그동안 몰라봐서 죄송.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열심히 사신 흔적이 글에서 보입니다.
여러가지 경험들이 앞으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많이 되리라 믿어요.
말많은? 월요반에 합류하신 것을 두손 번쩍 들고 환영하고요,
앞으로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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