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이 지극 했던 동생의 운명
金 花 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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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야! 장가 좀 가라! 왜 선을 안 보려고 그래 ! 너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니니?”
혼기가 늦었다며. 잔소리를 퍼부으면 피식 웃으면서 “걱정 마이소! 암투병중인 우리엄마 정성이 부족하면 아니 되옵니다.” 농담을 하면서
“누나 배 속으로 난 자식들도 엄마 소 대변 받기를 꺼리는데 어느 며느리가 반갑게 엄마를 맞이하겠어요. 내가 엄마의 손발이 되어 수발을 들 테니 걱정 마이소.
나만 고생하면 여러 형제가 편할 텐데!”
목욕을 시키면서 모자지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엄마 찌찌가 와 이리 작아졌노. 애, 게게……. 엄마 엉덩이도 쪼글쪼글하네. 그 평평한 살이 다 어딜 갔노?” 농담을 하면 그래도 엄마는 여자라고 자식 앞에서 몸을 움츠리며 빨리 수건 다오 “이놈, 어미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수건으로 몸을 감싸면 막내는 엄마를 안고 방안에 눕히곤 했다. 다른 형제들은 손도 못 대게하며 처음부터 임종까지 2 년 동안 극진한 효자 노릇해준 막내였다.
2년 후,
2011년 정월 대보름날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눈이 부슬부슬 내리는데 청주 미원 고개 길 비탈진 오르막을 운전하던 중에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대형 트럭 한 대가 동생 봉고차를 덮치고 말았다. 모두들 죽었을 거란 생각을 했으나 2시간 만에 경찰들이 차속에서 꺼내보니 숨은 쉬었다. 그 후 청주 한국병원으로 후송하여 14시간에 걸쳐서 대 수술을 받았다.
그날 밤 9시 뉴스에는 환자를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희망이 없다 했었다. 갈비뼈가 6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되고 하반신은 모두 부서진 너무나 큰 사고였다. 3일 만에 깨어난 동생은 횡설 수설 헛소리만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여서 모두들 장애자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가족들은 장애가 문제냐며 살아만 달라고 애원했다. 핸들 아래 부분의 하반신 모두가 부러졌으나. 그래도 기적적으로 머리를 안 다쳐 천만 다행이었다.
그 후 서울 중앙대 병원에서 18개월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며 13번에 걸쳐 재수술을 받았다. 온 몸 덩어리는 의학의 기술로 쇠붙이를 이리 저리 박고 허리뼈를 빼서 복숭아뼈를 만들고 엉덩이 살을 떼어서 이식 수술을 하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서히 몸 덩어리가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은 조금씩 걸음을 떼기 시작하면서 본인도 신기하다며 다시 사는 의욕을 느낀다고 어린 아이 걸음마 떼는 것처럼 기뻐했다.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까? 그 고통의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이겨냈으면 그토록 뜨거운 눈물이 나올까? 그 더운 여름에도 바깥구경 한번 못하고 병원 침상에서 세월을 보내는걸 보면 볼수록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목 메인 목소리 “누나” 엉엉 우는 막내
“왜 무슨 일이야 ? 또 무슨 일 터졌어.” 순간 머릿속이 핑 돌았다.
“왜 그래 아우야?”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왜 울어?” “누나, 나 ~신발 샀어요.”
“어머머, 그래 정말이니 ? 신발을 신을 수 있니 ?” “네, 나 지금 뛰어다닐 것 같아요 마음은요 !” 우는 전화 목소리. “ 18개월 만에 신발 신는 내 모습이 너무 감동이 북 받혀서 그만 누나를 찾았어요!”
“그래 막내야. 수고 했다 ! 살아줘서 고맙다. 이젠 사람 구실하겠구나.”
서로 전화기를 잡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퇴원한 후에 고향에 먼저 가고 싶다며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제일 먼저 고향을 찾아서 부모님 산소 앞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엄마! 나 살아났어요. 두 분 저 먼 곳에서 얼마나 걱정 하셨나요?
사람 되어서 여기까지 오는 날만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아파도 참았어요.
온 몸 덩어리에 칼자국 투성이고 몸속에 쇠붙이 덩어리고 그래도 참고 여기까지 왔어요. 아프고 못 견딜 때마다 저 먼 곳에 있는 엄마를 불렀어요! 나 살려 달라고! 애원도 했고 소리도 질렀어요.”
부모님 산소를 안고 하소연 보따리를 풀어 넋두리를 부리며 땅을 치고 동생의 통곡했다
“이젠 엄마 아버지 옆에서 비가 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주며 이 고향을 지킬랍니다.”
하며 목 놓아 울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원 없이 울었다.
“그래. 많이 울어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그 후엔 웃고 살자.” 등을 두드리고 달래며 절룩거리면서 산소의 잡초를 뽑으면서 “지금부터 잘 모실 겁니다.” 동생을 보면서 모두들 눈물바다로 그 자리를 떠나왔었다.
동생은 고향에서 아침저녁으로 산소에 가서 둘러본다. 효자 중 효자다. 얼마 전 태풍에도 산소 위에 멍석을 덮어주고 아침이면 걷어 주고 했었다. 하늘아래 몇 명이나 이런 효자가 있을까?
동생아! 장애 등급을 받을 지라도 슬퍼하거나 원망도 말고 살아있는 것으로
감사히 생각하고 항상 조상님 덕분이라 생각하길 바란다.”
살아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