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창작합평
  어머니의 시험지    
글쓴이 : 김미란    17-07-23 22:21    조회 : 8,047

어머니의 시험지   

김미란

 

10월의 끝자락, 남편이 얻어준 공짜 티켓으로 두 시누이와 함께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오케스트라연주를 감상했다. 공연이 끝나고 가까운 호프집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모처럼 만난 우리는 어쭙잖은 연주 평을 나누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주부로 살면서 이런 문화생활은 물론, 함께 술자리를 갖는 일이 쉽지 않아 깊어가는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시원한 생맥주로 목을 축이고 나자, 나와 동갑인 큰 시누이와 일곱 살 어린 막내 시누이의 입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쏟아졌다. 올해 팔순을 넘긴 동갑내기 시부모님은 가난한 살림에 오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어머니는 밭일이며 집안일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시험지돌리는 일을 하셨다. 참고서도 변변히 없던 시절, 교과과정을 시험지로 만들어 신문처럼 신청한 집에 매일 돌리는 일이었다. 교육열이 대단했던 어머니는 당신 아이들에게 시험지를 시킬 요량으로 부러 일을 맡아 품값으로 한 장씩 얻어다가 풀게 했던 것이다. 시골이다 보니 시험지를 신청한 집이 몇 집 되지 않아 품값이라고 해야 남은 시험지 몇 장 얻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이들의 통지표를 펼치면 그 안에 가득한 자에 배가 불렀다는 말씀을 어머니는 지금도 종종 하신다. 밭에서 일어나 흙 묻은 손을 대충 털고 시험지를 돌리러 뛰어다녔을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다가 불현듯 오랜 기억 속에 들어있던 한 아저씨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집에는 플라스틱 말이 있었다. 네 다리 옆에는 바퀴가 달렸고, 귀 부분에 손잡이가 있는 장난감 말은 나보다 네 살 어린 남동생의 것이었다. 오래되기도 했고 남동생이 많이 자라 잘 타지 않게 되자, 옆집 아저씨는 당신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지를 동생에게 물어왔다. 동생은 안 된다며 괜한 심술을 부렸다. 엄마가 나서도 소용없었다. 아저씨가 난감해하며, 어르고 달래 보았지만 동생은 더욱 고집을 부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저씨가 녀석을 말에 태우고 동네를 돌았다. 그렇게 한나절을 실컷 타고서야 동생은 아저씨에게 말을 내주었다. 하얀 러닝셔츠 바람으로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아 얻은 말은 다음날부터 아저씨의 아들이 타고 다녔다. 색이 바래 볼품없는 장난감을 얻으려고 애쓰던 아저씨의 모습이 한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아서 얻은 장난감 말에 아들을 태우고, 더 빠른 속력으로 또다시 동네를 누볐을 아저씨. 그분의 아들도 우리 시누이들처럼 어엿하게 자라, 지금쯤 옛이야기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으려나  

시누이들이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 나의 한쪽 가슴에는 뭔지 모를 아픔이 밀려왔다. 경제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친정 부모님. 어린 우리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엄마를 따라갔고, 그마저도 엄마의 형편이 여의치 않게 되자 곧 재혼한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가난해도 한 울타리 안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남편과 시누이를 보면 마냥 부럽다. 나의 유년이 몇 토막씩 잘려 나가 구멍이 숭숭 뚫린 허전함을 그들을 보며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이를 먹어도 부모님의 사랑은 화로처럼 자녀들의 언 마음을 녹여주나 보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내 호프집,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환기를 위해 조금 열어둔 호프집 작은 창문을 통해 소문처럼 서둘러 빠져나갔다.


오정주   17-07-31 10:35
    
김미란님 드디어 입성을 하셨네요 축하합니다~!!
어머니께서 교육열이 대단하셨군요. 현명하신 어머니 덕분에
'수'도 많이 맞았나봅니다. 동생이야기도 재미있네요. 아니
마음이 아프기도 하네요. 앞으로  아픈 이야기 즐거웠던 이야기
많이많이 나올 거 같습니다. 기대할게요 파이팅~!!
 
   

김미란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1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창작합평방 이용 안내 웹지기 02-05 80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