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우리 설날
민 인 순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윤극영의 ‘설날’은 ‘엄지척’ 감이다. 설날 즈음에 들으면 10살 아이처럼 들떠서 저절로 엄지손가락을 치세우게 된다. 도로가 주차장이 되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에 가고 싶어서 동요모음집을 준비했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나니 언제쯤이면 차가 막히지 않을까를 잴 것도 없었다. 그런데 고향이 그리웠던 사람들이 서둘러서 귀향을 한 때문인지 우리는 아주 쉽게 88올림픽 도로로 접어들었다. 방방 분위기를 살리는 동요를 들으면서.
차가 막힐 걱정에서 벗어나자 긴장이 풀렸는지 실없는 웃음이 푹 튀어나왔다. 어제 신문에서 본 ‘사이다 답변’ 때문이다. 처음에 ‘사이다 답변’이란 단어 조합이 낯설었다. 그래도 내 이해력이 부족함을 드러낼 틈 없이 사이다에 든 탄산가스의 성질이 떠올랐다. 사이다처럼 톡 쏘는 대답을 의미하는 새말이었다.
설날에 고향에 안 가고 혼자 지내고 싶은 가난한 2030세대를 위로하는 글이었다. 설날에 일가친척 어른들이 하시는 잔소리를 되받아 치는 상큼한 말대답이다. ‘연애는 하니?’ 하시면 2030 커플의 평균 테이트 비용인 월 48만 7448원을 지원해 주시면 연애할 수 있어요. ‘결혼 안 하니?’ 물으시면 우리나라 평균 결혼비용의 절반인 1억 1900만원을 주신다면 당장 결혼하겠다고 우물쭈물 하지 말고 눈 똑바로 뜨고 말하라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많은 청춘은 취업과 결혼에 도전할 의욕을 잃고 어깨가 축 처져서는 고향에서 만나게 될 어른들이 두렵다고 한다. 그래서 신문은 주눅 든 청춘들에게 설 선물대신으로 ‘사이다 답변’을 들려서라도 고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른들 입장에서 보면 버릇없는 말대답이겠지만 2030세대의 처지가 얼마나 안타까우면 신문이 나서서 공개적으로 편을 드나 싶었다.
나는 10대 때의 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때는 설이 되기 보름 전쯤부터 온 동네가 어수선하니 들떴다. 장터에서나 만날 수 있던 뻥튀기 아저씨가 마을 입구에 나타나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콩이나 쌀을 한 되 씩 들려서 줄을 세웠다. 뻥튀기 삯을 깎으려면 장작도 한 아름 안고 가야했다. 나도 옥수수 한 되 쌀 한 되 들고 줄을 섰다. 겨울 햇볕이 졸음이 올만큼 따뜻했다. 천지에 눈이 소복했지만 양지바른 곳에는 벌써 눈이 녹아서 붉은 흙이 뽀송뽀송했다. 동네 애들이 모두 나와서 전깃줄에 참새처럼 줄지어 앉았다가 아저씨의 귀 막으라는 소리에 다 함께 손을 들어 귀를 막으면 뻥 소리가 터졌다. 쌀 튀겨지는 소리가 하얗게 뒷산을 넘어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루 속에는 아이들의 웃는 소리가 불어난 뻥튀기만큼이나 가득씩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엿을 고고 가래떡을 하고 노랗게 기름을 짜면서 설을 준비하셨다. 어머니는 내 등에 대나무 자를 댔다가 떼고 댔다가 떼고 하시며 색동저고리를 만드셨고 새신도 사왔는데 나는 아까워서 바로 신을 수가 없었다.
그믐날 밤에는 방죽 건너에 사시는 고모가 사촌들을 데리고 건너오시고 감나무 골에 사는 고모도 오셔서 밤이 깊도록 꺄르륵 웃고 가끔씩은 훌쩍이며 눈물을 닦기도 했다. 어머니는 들기름을 작은 종지 여러 개에 따라서 명주솜을 말은 심지를 넣어서는 장독대에, 선반 위에, 광에 불을 밝혀 ‘해지킴’을 하시느라 바쁘기만 하셨다.
헛간 홰에서 자던 수탉이 파드득 날갯짓을 하면서 꼬기오 목청을 돋우면 새벽이 왔다. 이어서 사랑방 방문이 열리고 ‘음흠’ 헛기침 소리가 났다. 찰박찰박 물 깃는 소리도 났다. 나는 밤새 맑게 고인 물을 떠올리며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가마솥 가득히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은 채우셨다. 아버지가 일어나시면 식어 가던 방구들이 다시 뜨거워졌다. 싸한 웃풍 때문에 머리까지 당겨서 썼던 이불은 스르르 미끄러졌다. 밤새 차오른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서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면서도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사랑방에서 주무신 친척들이 앞마당에 나오시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일어나서는 아버지가 따뜻하게 데워 놓으신 물을 떠서 세수를 했다. 설빔 입고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고 떡국과 나이를 먹었다.
그 때는 그랬는데······.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간은 흘러 설 풍속이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요즘 10대들은 여전히 설을 기다린다. 며칠 전에 10대 여학생과 설날에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 아이는 미리 생각을 해뒀던 것처럼 얼굴마저 빨갛게 하고는 후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에 갈 거예요. 세뱃돈을 50만원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 돈을 가지고 친구들과 서현역 로데오거리에 가고 싶어요. ‘삼시세끼’ 분식집에 가서 매운 떡볶이를 먹고 노래방에 가서 ‘방탄 소년단’노래를 들어 보고 불러도 보고 싶어요. ‘다이소’에 가서 필요 있는 물건들을 사고 햄버거를 먹으면서 귀찮은 남자 애들 ‘뒷담화’를 하고 싶어요. 입술에 바르는 빨간색 ‘틴트’를 사가지고 늦게 들어가도 혼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핸드폰 중독’이란 핀잔을 안 듣고 밤새도록 핸드폰을 만지고 싶어요. 깜찍한 10대는 게임하고 노래 듣고 문자를 보내면서 침대에서 뒹굴고 싶다면서 마음을 잔뜩 부풀렸다. 작년 설에 장가도 안 간 막내 삼촌이 턱 내주었던 ‘신사임당’을 떠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 전통 의상이나 민속놀이에 대한 기대는 없었지만 설에나 맛보는 여유와 세뱃돈의 설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아이가 귀여웠다.
내게 설날은 고향에 가는 날이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을 때는 언제나 서슴없이 찾아가려는 예행연습인 셈이다. 남편을 따라 꿈을 찾아서 훌쩍 고향을 떠났었지만, 고향은 수구초심을 이해하는 언덕이고, 언제나 마음이 원하면 돌아갈 어머니의 품이다. 내가 만약,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더라도 고향에서라면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의 명절은 변함없이 10대의 설처럼 아름다워야 한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살뜰함에 이끌려서 저절로 고향으로 발길이 돌려지게 되는 매력을 간직해야 한다.
오늘도 그 때의 부풀었던 즐거움을 떠올리며 고향에 간다. 해마다 설을 보내지만 어릴 적에 그 설은 아니어서 안타깝다. 그래도 올해는 꼭 그 때의 천진하게 뿌듯했던 기분을 다시 맛볼 수 있을 거라는 엉뚱한 기대를 한다.
나는 정유년 첫날에 신문을 보고 학습한 대로 상처주지 않는 말하기를 하려고 애썼다. 20대 조카들과 30대 사촌이 따뜻한 설을 보내기를 바랐다.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에도 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요긴한 위로가 될 것을 아니까. 그래서 푼수인양 달걀 이야기만 했다. 달걀 값이 좀 내렸지요? 조류 독감 때문에 달걀 값이 두 배가 넘게 올랐었잖아요. 달걀 맛은 세계 공통인가 봐요. 얼마 전에 캄보디아에 갔었는데요. 달걀 프라이를 먹겠다고 줄을 섰었지 뭐예요. 흑인도 백인도 황인종인 나도 쭉 줄을 섰었어요. 베트남이나 중국에서 먹었던 달걀도 진짜 우리 달걀과 같던데요. 하얀 미국 달걀도 우리 것과 같은 맛이 나던데요. 두바이에서는 달걀이 무척 비싸다면서요.
2017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