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민 인 순
“뻐꾹 뻐꾹 뻐꾸국~~”
맹산에 사는 뻐꾸기인가 보다.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 장난이 요란스럽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면 여름이 온다는 노랫말처럼 뻐꾸기가 첫 여름 인사를 한다. 며칠째 낮 기온이 삼십 도가 넘는 것을 보면 이미 여름이지만 통상적으로 보면 유월 첫 날인 오늘부터가 여름이다.
장미는 여전히 붉고 미세 먼지 농도가 보통으로 맑다. 남편과 아이들이 제각기 맡은 일을 위해 집을 나가고 나만의 시간이다. 소란한 아침 시간을 지낸 후에 즐기는 잠깐의 고요가 좋지만 금방 나 혼자만 네모 안에 갇힌 듯한 단절이 부담스럽다. 나는 무의적으로 TV 리모콘을 들고 있다.
“상담원 연결이 어렵습니다. 뻐꾹 뻐구국~~ 자동 주문 전화로 들어오십시오. 뻐꾹~~ 동시 접속 900분······ 백화점 동일 상품이지만 가격 차이는 ······ 받아보신 후에 마음에 안 드시면 돌려주세요. 반품 택배비는 받지 않습니다. 뻐꾸국~~.”
개개비의 둥지에 알을 낳고 떠나버리는 뻐꾸기의 무책임을 닮은 쇼호스트의 닳아진 말투에서 신뢰를 느낄 수는 없다. 그래도
‘그래, 일단 주문하고 그리고 백화점에 나가보자.’
나는 ‘본방사수’그런 것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월드컵 축구 경기나 올림픽 경기라면 몰라도 드라마 부문에서는 특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고정으로 보는 프로그램을 갖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아무데나 채널을 고정한 채 집안일을 하며 돌아다닌다. 꼭 보겠다는 작정이 아니었다. ‘화이트 소음’이 필요해서 TV를 켜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고 이제는 병이 된 것인가?
오늘도 5번, 7번, 9번, 11번, 14번 지상파 방송 채널을 천천히 넘겨본다. 지상파 방송 사이사이에 홈쇼핑 채널이 있다. 매력이 없는 그렇고 그런 일방적인 방송보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편하고 쉽게 살 수 있는 쌍방향 홈쇼핑 방송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나는 충동적으로 구매를 할 정도로 생활이 지루하거나 불만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필요한 것도 참는 자린고비형도 아니다. 분별없이 과소비를 하는 마구잡이형도 아니다. 그럼 알맞은 것을 적절하게 구입하는 알뜰형인가? 곰곰이 생각하니 꼬치꼬치 따져보고 사는 알뜰형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물건을 사는 것을 사는 즐거움 중에 하나로 여긴다. 나는 사는 것이 즐거워서 산다.
집을 사면 삼 년이 즐겁고 차를 사면 일 년이 즐겁고 옷을 사면 한 달이 즐겁다는 말로 무언가를 사는 즐거움을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비하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어떤 것이든 사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이 돈도 쓸데가 없다고 하실 때의 그 슬픈 눈을 기억한다. 스스로 살 수 있는 것은 삶의 생기다.
어느새 광고의 효력에 말려서 주문 전화를 걸고 있다. 드럼 세탁기용 세재가 7통이다. 가격은 낱개보다 저렴하다. 1년도 넘게 쓸 것이 예상된다. 1리터당 가격이 대형 마트보다 싸고 사은품을 주고 해당 카드를 사용하면 5퍼센트 할인도 된다. 또 무거운 세제를 집 안까지 배달해 줄 것이다. 1000원 할인이 되는 자동주문 전화로 접속 중이다. 알뜰하게······. 아이들은 이럴 때 ‘득템’이라 하는데 ‘득템’이 맞을 것이다. 뿌듯하다. 그러나 오늘 일도 남편에게는 비밀이다.
어제는 중학생 범이와 비밀 약속을 했다. ‘중딩’도 사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민샘, 엄마에게는 비밀로 해주실 거지요?”
부탁을 넘어서 다짐을 받고 싶은 말투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알겠다고 했다. 범이가 도착할 시간이 지나서 전화를 할까 문자를 할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좀 늦게 온 아이가 숨을 헉헉 몰아서 쉬기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만족하게 웃으면서 과일 그림이 귀엽게 그려진 새콤하고 달콤한 젤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복숭아, 딸기, 레몬 향이 나는 쫀득쫀득한 것을 하나 주면서 같이 먹자고 했다. 아이들에게 군것질거리는 그가 했을 수고에 대한 보람이거나 보상 같은 매우 귀한 것이어서 친한 친구 사이에도 후하게 베풀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도 내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나름대로는 예의를 갖추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른답게 나는 먹은 셈 칠 테니 맛있게 먹으라고 했다. 범이는 양이 꽤 많다면서 먹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공부하러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젤리를 산 것이고, 그 사실을 엄마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편의점에 혼자 가서 마음에 드는 것을 사는 것이 해보고 싶은 일 중에 일 순위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 한술 더 떠서 말했다. 다음으로 해 보고 싶은 것은 컵라면을 직접 사서 먹어보는 것인데 언제쯤 실천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도 되겠냐고도 했다.
내가 사는 것을 소소한 사는 즐거움으로 느낀 것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학생답게 친구들이 들락날락 하는 편의점이 그가 가보고 싶은 곳 일 순위라니 너무나 가벼운 바람이 아닌가? 그래서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 내가 아는 보통의 엄마들은 아이를 가까이서 돌본다. 곁눈질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전업 주부만이 아니라 일하는 엄마들도 철저하게 생활 관리를 한다. 아침 등교부터 수업이 끝나는 하교까지 그리고 방과 후 수업에 가는 모든 일정이 엄마와 공유된다. 집에서도 엄마의 눈총은 아이의 어딘가를 겨냥하고 있다. 직접 볼 수 없을 경우에는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범이의 엄마도 내가 아는 요즘 엄마다. 그래서 범이가 어떻게든지 즐길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 아무거나 먹지 말라고 타일렀고, 슬기로운 생활 교과서에서 허락하지 않은 행동을 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겁을 줬었다. 그렇게 했지만 청소년이 된 아들과 딸이 털어 놓은 어릴 적 이야기 중에는 엄마 몰래 학교 앞 문방구에서 맛있는 거 사먹었던 일이 인상에 남는다고 했다. 그런 걸 보면 엄마만 모르는 아이들의 비밀은 있다. 그것은 나 아닌 누군가가 눈 감아 주고 누리게 한 사는 즐거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범이 엄마와 나는 나와 내 막내 동생 쯤 되게 나이 차이가 나는데, 내가 언니답지 못하게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은 후회가 된다. 그러나 나와 범이의 약속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인 것이지 무게는 없다. 오늘 내일 사이에 밝혀지면 적지 않은 불호령이 예상되는 사건일 것이지만 일주일 쯤 시간이 지나고 나면 호호 웃어 버릴 가벼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범이는 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책 한 권 읽고 백 원을 받으면서 그 대가로 누리는 즐거움을 기대할 것이다. 내가 남편 모르게 뭔가를 사기 위해 일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