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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글쓴이 : 홍수야    25-07-06 22:23    조회 : 8
   수필(가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hwp (32.5K) [0] DATE : 2025-07-06 22:23:32

한창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려 눈을 뜬다. 수십 번 뒤척이고 나서야 미처 다 풀지 못한 피로를 몸에 감은 채 집을 나서는 이들의 이름은 바로 가장들이다. ‘손돌이추위에 콧등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그들의 발걸음을 바쁘게 재촉한다.

<안전제일>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표지판이 공사장 군데군데에 세워져있다. 이들은 큰 공사를 맡으면 정해진 기일까지 끝내야 하기 때문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수은주의 장난질에도 작업을 계속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근로자들의 건강을 체크하는 출장검진 팀에서 일하고 있다. 나 역시 근로자들과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여 업무시작 전 짬이 날 땐 위로 올라가고 있는 건물 꼭대기로 고개를 들어본다. 몇 층인지 가늠이 안 되는 공중에는 가로 세로로 촘촘하게 걸쳐져 있는 철근 위를 건너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짓고 있는 건물에는 노란색의 두꺼운 비닐과 합판으로 가림 막이 쳐져 있지만 조그맣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곡예사가 공중에서 밧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발은 분명히 땅에 붙이고 있건만 갑자기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같이 다리가 후들거리며 속도 덩달아 울렁거린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실내로 들어가 서둘러 검진준비를 하게 된다.

문밖에는 검사를 받기 위해서 줄을 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온다. 금식 중이어서 그런지 그들이 하는 이야기엔 짜증이 넘쳐나고 뾰족한 송곳처럼 날이 서 있다. 근로자들이 예진표에 인적사항을 작성하여 내 앞에 오면 혈압을 재게 되는데 내미는 팔에는 옷이 너무 두꺼워 도저히 잴 수가 없다. 동장군에 맞서기 위해 장롱의 두꺼운 옷들을 겹겹이 입고 나오는 바람에 그걸 벗는데 걸리는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나기 일쑤다. 옷에서 발생되는 정전기가 찍찍이처럼 달라붙어 쉽게 벗지 못하고 당황해한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벗으시라고 말하지만 내 속에서는 이미 대여섯 명은 혈압을 재고 지나간 상상을 하며 기다린다. 이들이 입고 있던 작업복에는 앞쪽 뒤쪽 가릴 것 없이 송송하게 구멍이 나 있거나 페인트가 묻어 있어 작업복 본래의 색과 모양은 온데간데없다. 그건 아마 일하는 동안에 세상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치고 깨져서 생긴 영광의 훈장이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벗은 작업복을 옆에 두고 드디어 혈압을 재게 되면 입가엔 엷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점점 아래로 떨군다.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혈압을 잴 때 정상보다 높게 나오면 마치 본인이 잘못한 것 마냥 조금 낮추어 기록해 달라고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말한다. “왜 그러시냐?”라고 물으면 할 말을 잃어버린 것처럼 한참 뜸을 들이다가 업주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내 일자리를 끊을까봐 걱정이 되어서라는 대답을 한다. 그 순간 왜 그렇게 짠해지던지~

그럴 때 나는 그들에게 설명해 준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정확히 알고 관리를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손바닥에 생긴 굳은살을 보게 되면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가족들을 지키는 가장들의 강한 가족애를 엿볼 수 있다. 험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이런 종류의 일을 기피하며 놀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당신들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거짓 없는 땀을 보고 있으면 천금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널리 알리고 싶다.

혈압체크가 끝난 후엔 채혈을 하게 되며 정부의 지원으로 검사를 하게 된다. 그 혈액으로 약간의 비용만 추가하면 각종 암 검사까지 할 수 있어 비용도 훨씬 저렴하다는 설명을 코디네이터가 해드리는데. 그걸 들은 사람들은 한동안 말이 없다. 아마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을 떠올리며 계산기를 두드렸을 것이다. 그런 후에야 돌아오는 대답은 결국 다음에 하겠다며 슬쩍 거절하는 모습이 마치 깨진 굴뚝사이로 연기 새어나가 듯 한다. 우리나라 보통가정에서 살림을 이끌어가야 하는 가장의 수입은 왜 항상 부족하기만 한 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요즘은 도 아무런 증상이 없는 초기에 발견하면 간단하게 완치를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병을 초기에 발견하고 키우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하는 검진이다.

그들도 총각시절에는 이것저것 재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 위주로 거리낌 없이 했을 것이고 나팔바지에 베일 듯이 주름을 세우고 폼 잡고 사는 것이 밥 먹여주는 줄 알고 청춘을 즐긴 사람도 있었을 테고. 그러다가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맘에 드는 어떤 여인을 만나면 그녀가 원하는 차와 음식을 따지지 않고 팍팍 시켜주며 어깨를 올렸던 시절도 있었을 텐데!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를 위해서 하늘에 떠있는 별을 따다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나서는 희미하게 밀려오는 현실의 안개들을 걷으며 아직 그들이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가장들이다. 엷게 짓는 미소 뒤에 감추어진 이야기들을 속으로 삭여야하는 당신들의 고달픔을 언제쯤 떨쳐낼 수 있을지! 오늘날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남편들의 삶은 보통 아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배 더 힘들다고 어떤 전문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가장들은 아내와 말다툼이라도 하는 날엔 용돈이 너무 적다며 심지어 잠자리 날개만큼 가벼워서 써 볼라치면 없어져 버린다고 불만을 하소연 해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안양천을 따라서 자주 걷고 뛰며 운동을 한다. 봄이 오면 거기에는 오색 이불을 펼쳐놓은 듯 알록달록한 꽃들로 물들기 시작한다. 겨울 동안 추위에 움츠리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사람들도 삼삼오오 어울려 꽃구경을 하느라 북적이는 소리로 사방은 요란하다. 벽돌담에 달라붙어 추위에 몸을 떨며 겨울을 보냈던 담쟁이넝쿨도 봄바람 소리에 기지개를 켜고 서서히 녹색의 돗자리로 변신하여 여린 꽃들을 보호하며 맘껏 뽐낼 수 있게 작은 역할을 한다. 초봄엔 제비꽃을 비롯하여 연보라색의 나팔꽃 등이 뽀시시 눈을 뜨는 것을 시작으로 햇살 따가운 여름이 되면 마치 오는 임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담장 밖으로 널브러지는 능소화까지 핀다. 많은 꽃들의 무게를 마다 않고 묵묵히 받치고 있는 담쟁이 넝쿨의 모습을 보면 새벽바람 맞으며 뚜벅뚜벅 일터로 나가 세상을 여는 우리 주위에 흔히 있는 가장들의 모습과 닮은 것 같아서 자꾸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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