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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 빛 유월    
글쓴이 : 이경희    12-07-21 09:44    조회 : 5,755
    회색 빛 유월
 
                                                                                                                                이경희
 
 유월이 된 후 부쩍 흐린 아침을 맞이하면서 으레 아침에 일어나면 밖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정말 흐리네. 유월이 되긴 됐나 봐.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게 된다. 잔뜩 회색 안개에 휩싸여 있다가 햇빛에 말라가며 정오쯤 되어서는 빛살을 보여준다. 회색 빛 하늘, 어두운 연두색 나뭇잎, 물기 어린 대기, 몸에 착 감기는 대기의 감촉, 그리고 비 등 전형적인 유월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며 내 기억 속의 유월로 빠져들게 한다.
 
 유월은 완성보다는 미완성, 명랑보다는 우울이 생각난다. 하룻강아지 같이 경쾌하게 팔랑거리던 잎새들도 앎이 늘어가면서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잎새의 크기는 멈췄으나 보다 진한 색을 가꾸는 숙성의 시간을 갖는지 모른다. 유월의 회색 빛 거리는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유행성 알레르기처럼 우울증을 도지게 하는 것 같다. 회색 하늘빛마저 가려 놓은 연두색 잎새들 때문에 가로수 길은 어둠이 군데 군데 스며 있어 모든 걸 가물거리게 한다. 때문에 눈물이 흘러내려도 들킬 염려가 없다.
 
 
 유월에 대한 나의 인상은 도시에 올라온 후 맞이한 몇 번의 유월이 나에게 각인 된 것 같다. 유월의 농촌은 유월의 색을 눈 여겨 볼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보리, 밀 타작과 못자리 가꾸기, 모내기 등 한 해 농사의 굵직한 부분들을 유월에 해야 하기 때문에 탈곡기소리, 물소리, 농부들의 농가가 끊이지 않고 인접한 각자의 논에서 서로서로 주고 받는 대화조차도 창가의 한 자락이 되어 분주한 유월에 편승한다. 내가 한 일은 열린 들판을 마음껏 가르고 들꽃 무더기 속에 철푸덕 앉아 둥그런 자국으로 짓이기기가 고작이었다.  
 
 스무 살 무렵 도시에서 맞이한 유월은 사뭇 달랐다. 농촌은 깔끔하게 수납할 수 없게 덩치 크고 흙 묻은 농기구와 잡동사니가 집안을 규모 없이 어지르는 가운데 도시는 많은 것들이 말끔하게 포장되고 심지어 사람들의 마음까지 포장되어 반지르르 했다. 도시 뒷골목으로 밀려난 한유한 우울이 내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게다가 청춘 자체가 한숨이던 시절이기도 하였고 특히 유월의 비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비가 왔다. 반 지하 창문은 빛이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비 오는 날은 그마저도 막혀버려 좁은 방엔 어둠을 밝힐 형광등이 찌르륵 끓고 있었다. 찻물 끓는 소리가 가장 활기차고 조금이나마 생기를 돋워주는 듯 했다. 차 한잔 갖고 와서 비 오는 창 밖을 바라본다. 창문은 스크린이 되어 비 오는 모습을 투영했다. 철 창살에 둘러싸인 유리문에는 빗물이 주르륵 길을 내다가 곁가지로 갈라지고 새로운 줄기에 섞여 어지럽게 흘러내리고, 철 창살에 팅팅 부딪치며 경쾌하게, 바닥에 찰프닥 찰프닥 빗방울을 튕기며 계속 비는 내리고 있었다.
 
 우울에 시간을 뺏기기 싫어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왔다. 만나자는 연락도 없고 갈 곳도 마땅찮아 도서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얼마 후 뒤에서 뛰어 오는 소리가 나는가 싶었다. 나는 여전히 우산 밑에 또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는데 내 신발 옆에 다른 신발이 나타났고 한발 앞서 가로 막혔다. 순간 옆을 돌아 보았더니 검은 뿔 테 안경을 낀 어떤 남학생이 서 있는 것이었다. 머뭇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며 혹시 시간 있어요? 차 한잔 해요. 이러는 거였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다가 빼버린 것처럼 낭만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듯 했다. 내게는 무척 생경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게도 사랑이 찾아 올까요? 하며 아련한 사랑을 꿈꾸고 있던 나는 배경음악이 사라진 무미건조한 사건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스무 살의 호기심은 일었으나 난 할 일이 너무 많아 바빠서요. 하고 말았다. 법을 공부한다고 소개를 하고 한사코 내 옆에 나란히 걸으며 말을 걸어 왔지만 나는 도서관 건물 속으로 들어가며 그를 가벼운 목례로 떠나 보내야 했다.
 
 바람이 일고 연두색 잎새들이 은빛 뒷면을 보이며 흔들리더니 곧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날도 텅 빈 마음에 혼자만의 대화로 채우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앞에 다다랐을 때 가로수 스피커에선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처럼 경쾌하면서도 씩씩하고 담담했다. 우울함에 대한 카타르시스. 빗속에서 춤추고 싶은 충동. 소나기 내린 후 산뜻함이 느껴졌다. raindrops, falling on my head, one thing, I know, blue, crying, happiness, nothings worrying me 같은 단어가 얼핏 들려왔다. 내 얘기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BJ Thomas의 <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 였다.
  
  빗방울이 내 머리 위에 계속 떨어져요 /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빗방울이 계속 떨어져요 / 난 해에게 말했어요
  졸면서 일하는 태도가 맘에 안든다고 / 계속 빗방울이 떨어져요
  그러나 내가 아는 한가지는 / 아무리 나를 우울하게 하여도 나를 이길 순 없다는 것
  머잖아 행복이 다가와 나를 기쁘게 해줄 거예요 / 비가 계속 내려요
  그래도 슬퍼하진 않을 거예요 / 우는 건 내게 어울리지 않거든요
  불평한다고 비가 그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 나는 자유로우니까 어떤 것도 나를 걱정시킬순 없어요/
  머잖아  행복이 다가와 나를 기쁘게 할 거예요 (후략)
 
 
 매년 유월이 찾아오고 유월에 대한 기억이 어느 해인가 잊혀진 채 유월이라는 하나의 추상어로 집적되어간다. 내 의식의 저편에서 유월에 해당하는 저편에서 우울함과 감미로움이란 수식어로 함께 어우러져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유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우울하게 감미롭게 유월의 분위기에 취해있다가 7월 쨍쨍한 태양 아래로 나갈 일이 걱정이다. 너무 민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류미숙   12-07-21 23:20
    
회색빛 유월이 주는 멜랑콜리...
인간에게 우울, 미완성의 감정들이 없다면
구름 뒤의 태양도 그토록 찬란하게 느끼지는 못하리라.
이경희님의 감미롭고도 우울한 유월의 추억이
제 가슴에도 전해져 오네요.
그 남학생과 비오는 날 차 한 잔 못나 눈 것
아쉽네요. 미완의 유월 맞습니다.ㅋ

이제 7월의 태양일랑 걱정 마시고
쨍쨍한 태양 속으로 나아가 활기차고 역동적인
경희님의 7, 8월을 기대합니다.

‘햇빛 쏟는 거리에서 웃자, 웃자,
우리는 너 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저도 노래가 생각나네요.ㅎ

덕분에 유월의 멜랑콜리에 잠깐 젖어 보았습니다.
추억에 젖게 한 글 잘 읽었습니다.
화이팅!!!
     
이경희   12-07-22 15:05
    
참 오랜만에 창작합평에 글 올려놓으니 처음 올릴 때처럼
떨렸어요.
그런데 댓글로 용기 주셔서 기뻐요.

'햇빛 쏟는 거리에서 웃자, 웃자'
노래처럼
저, 7월의 쨍쨍한 태양아래서 웃고 있어요.^^ 보셨죠?
고맙습니다.
오윤정   12-07-22 12:42
    
미완의 유월.
정점을 향해가는 발랄한 유월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겐 회색빛 유월로 남아 있을 수 있네요.
제가 태어난 달이라
전 유독 유월이 남다르답니다.
선생님의 잔잔하고 깔끔한 문체.
같은 계절에서도
다른 모습을 찾아내시는 선생님의 시선이
아름답습니다.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이경희   12-07-22 15:14
    
오윤정 선생님, 반갑습니다.
요즘 왕성한 글쓰기하시는 모습이 돋보였습니다.
참 좋아하는 글들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응원의 댓글까지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이은하   12-07-22 21:58
    
스무살때 처음 맞이한 유월 ...
회색 빛 유월 ...
우산속의 가날프고 여린 예쁜소녀가 떠오르네요
검은 불테 안경의 남학생과 잘됐음 회색 빛 유월이 아닌
싱그럽고 찬란한 유월을 맞이할수 있었을텐데
아쉽네요.
그럼 제목도 달라질텐데...
경희님
이제 싱그런 유월 칠월도 맞이하시길...
     
이경희   12-07-24 09:46
    
처음 단짝은 끝까지 단작 ^^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됐으면
싱그럽고 찬란한 유월이 되었겠죠.
지금, 저두 아쉽네요.
항상 각별한 애정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조정숙   12-07-24 10:15
    
회색빛은 우울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많은 색을 함유하고 있기도 하지요
경희씨의 넓은 마음처럼...
이젠 예전의 그빛이 아닌 밝은 유월을 기억하면 좋겠네요
     
이경희   12-07-24 23:22
    
참 마음이 여린 우리 반장님,
따스한 위로 고맙습니다.
저 걱정하시는 만큼 그렇게 우울해하지 않아요.
덕분에 행복합니다
안정연   12-07-25 11:24
    
우울함과 감미로움이 함께 어울어진 유월!
살아가 는 우리들의 모습을 너무도 잘  표현하신 글입니다.
저에게도 나름의 아픔이 있는 계절이지만 유월의 장미와향기를
흠양하면서 더워질 것들을 이겨나갑니다.
칠월의 폭양과 장마를 대비하는 유월의 멎진 회색빛 구름과
 나뭇잎위에 떨어지는 멋진 빗방울소리에 경쾌하고 힘찬 칠월과 앞날을
맞이하시기를... 화이팅입니다. 멋지고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이경희   12-07-25 18:37
    
안정연 선생님,
댓글로 만나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7월의 폭양에 지쳐계실텐데
너무 축 쳐지게 하지 않았나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격려 메시지에 아이같이 웃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화용   12-07-26 10:41
    
아, 이 글이 올라와 있었군요.
제가 11월에 느끼던 이유 모를 우울을 '11월 단상'이라는 글로
풀어내고는 그 우울에서 조금은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좀 명확히 볼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러면서, 우울과 감미로움이란 상반된 정서를 느끼면서
작가는 소녀에서 처녀로 여인으로 성숙되어 갔을 것입니다.
서사가 남발되는 글들을 보면서
이렇게 조금은 맨송한, 뭔가 일어날 듯 말 듯한 이 글에서
더욱 귀한 작가의 감성을 느끼게 됩니다.
경희님 아름다운 본성을 엿보게 되서 기뻐요.
이경희   12-07-27 15:19
    
한명만이라도 저의 의도를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샘께서 저의 마음을 이해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요즘 얼굴이 예쁘고 편안해 보여서 참 다행이고
나름 뿌듯합니다.
늘 좋은 충고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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