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나를 부르는 엄마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홀쭉한 볼에는 미처 닦지 못한 눈물이 묻어있다. 밭에 심어놓은 부추를 얼른 베어 오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 빠진 칼과 조그만 소쿠리를 대충 챙겨서 밭으로 향했다. 대문을 나서는데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내 뒤통수를 때린다. 술안주가 없다고 화가 나신 것 같다. 나는 놀란 가슴을 안고 달리느라 발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부추 밭에 도착했다. ‘어머나! 부추가 왜 이렇게 자라지 않았냐.’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옆을 둘러보니 친구네 밭의 부추는 길쭉길쭉하여 불어오는 바람 따라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밭두렁에 주저앉았는데, 메마른 자갈밭에 도라지꽃들이 흰색 보라색으로 부추를 둘러싸고 피어있었다. 새벽에 내린 이슬로 세수를 마친 꽃들은 따뜻한 햇살에 반사되어 바라보고 있는 내 눈이 시려왔다. ‘빈 소쿠리를 들고 가면 우리 엄마는 어떻게 될까?’그러나 꽃들은 나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옆동네불구경 하듯 한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친구네 부추를 소심하게 베어서 소쿠리에 담았다. 누가 볼까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서 부추 밭을 나왔다, 내 마음속의 양심 같은 것은 수풀 속에 던져버리고 집으로 냅다 달려왔다. 그걸로 엄마는 부침개를 만들어 아버지 술안주로 챙겨드릴 수 있었다. 그때의 부추가 우리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엄마는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가슴에 겹겹이 누르며 세월을 견뎌냈다. 맨 정신으로 살기가 힘에 부쳤는지 언제부터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현재 96세인 엄마는 가끔씩 당신 엄마를 부르며 울기도 한다. 우리 형제 중 엄마의 가슴 밑바닥에 자리 잡은 멍을 조금이라도 지워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엄마를 만나서 놀 때 “엄마는 힘들 때 도망가지 않고 왜 그냥 살았어?” 라고 여쭈면 “아이고! 이 마음을 네가 알아주니 분이 좀 풀린다.” 라고 하시며 웃는다. ‘엄마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께는 귀여운 막내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내가 주먹보다강한펜으로 당신의 한을 풀어 드리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숱한 고비를 넘기며 학업에 매진했다. 어두운 밤에 산길을 걸어 하교할 때면 내 발자국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서움에 떨기도 했고, 어떤 날은 읍내에서 버스로 자갈길을 달려서 집으로 가기도 했다. 버스 안은 술에 취해 본인 집인 양 의자에서 쓰러질 듯 말 듯하며 잠에 빠진 중년 아저씨, 늦은 밤까지 공부하느라 기운이 소진되어 흔들흔들하는 학생들, 그리고 달이 뜨는 밤에는 달까지 버스 창문에 매달려 따라오는 시끌벅적한 시골버스다. 산중턱에 나를 내려준 버스는 또 다른 마을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간다. 사방은 곤충들 울음소리만 구슬프게 들릴 뿐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나는 산 아래 마을의 뱃사공 집에 들어가 아주머니께 강을 건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면 자고 있던 뱃사공은 나룻배에 나를 태우고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삿대를 저어갔다. 건너편 모래사장에는 나를 부르는 엄마의 고함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들려온다. 집전화로 연락받은 엄마는 마중을 나와 손전등을 흔들며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강에서 집까지 엄마와 걷는 그 시간이 형제가 많은 내게 엄마를 독차지하는 유일한 시간이어서 좋았다.
내가 취업을 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서 종합검사를 해드렸던 일이다. 엄마의 위장 벽은 내시경으로 검사한 결과 마치 작은 웅덩이처럼 패어 있어 중증위궤양 진단을 받았다. 술을 좋아하시는 남편 시집살이에 속이 성할 리 만무했다. 그 후 몇 년간 약물치료를 하여 완치 판정까지 받으시고 음식을 제한 없이 잘 드시게 되었다. 또 예방접종은 빠짐없이 해드려 건강을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직장에서 휴가를 받으면 엄마를 모시고 유원지나 꽃놀이 행사장을 다니며 구경을 시켜드리려고 노력했다. 남편은 운전을, 그리고 엄마와 나는 뒷좌석에서 흘러간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모녀는 소풍을 즐겼다. 어느 식당 사장님들은 본인 엄마가 생각난다며 귀한 반찬을 넉넉히 주시기도 했다. ‘언젠가는 엄마가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면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내가 5학년이 되었을 때 합천군에서 주최하는 독후감 경진대회에 참가하기로 선발되었다. 선생님께서 루이스 스티븐슨의 대표작 <보물섬>이라는 책을 사주시며 재미있게 읽고 우리 학교를 빛내자고 말씀하셨다. 나는 시간이 날 때면 책속에 흠뻑 빠져 읽어나갔다. 하지만 집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형제들은 내가 노는 것으로 보였던지 가자미눈으로 흘겨 대는 바람에 일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책을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경진대회를 나가지 못했다. 학교를 빛내보겠다던 야무진 내 꿈은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늦가을 낙엽처럼 날아가 버렸다.
세월이 흘러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날에 있었던 사연을 글로 써서 라디오 MBC <여성시대>에 보내 상을 받기도 했다. 담당 피디가 전화 와서 아주 잘 쓴 글이라며 라디오로 방송될 것이라고 했으나 나는 막상 일에 파묻혀 살던 때여서 듣지 못했다. 상금으로 사십구만 원 (칠 만원 의류교환권 일곱 장)을 탔다. 평택에 살고 있던 나는 서울까지 와서 옷으로 교환하여 기차와 택시에 싣고 가느라 진땀을 뺐다. 옷 보따리가 몇 개 되는 바람에 그걸 본 택시기사는 옷 장사를 하는지 묻기도 했다. 나는 그 옷들을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며 맘껏 인심을 쓰기도 했다,
나는 그 후에도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글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놓은 적이 없다. 물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을 창작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된다. 용기 내어 발을 내디딘 수필 쓰기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