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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 고요함에 스며들다    
글쓴이 : 전혜숙    24-09-19 16:36    조회 : 42
   전혜숙(소녀 고요함에 스며들다).hwp (73.5K) [0] DATE : 2024-09-19 16:36:03

소녀 고요함에 스며들다

전혜숙

 

충북 중원군 살미면 무릉리는 내가 태어난 곳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동요고향의 봄은 내 고향의 모습과 똑 닮았다.

 

아버지는 8남매의 맏이였다. 막내 삼촌이 다섯 살, 아버지가 열일곱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한 때는 명문중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편히 앉아서 공부만 할 수는 없던 형편이었다. 늘 술에 절어 살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당신의 형제들에게는 부모 대신으로, 마을에서는 젊은 새마을지도자로, 집안에서는 일곱 식구를 거느린 가장으로 바쁘게 사셨다.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홀시아버지와 말썽 많고 말 많은 시댁 식구를 감당하느라 늘 신경이 예민했고 특히 나에게 잔소리가 많았다.

 

나는 천성적으로 자유인의 기질이 다분했다. 엄마가 뭐라 하든지 비가 오면 비를 맞았고,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부는 날은 운치가 있어 더 좋았다. 엄마한테 야단을 맞아도 들로 산으로 나다니다 보면 울적했던 마음이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곤 하였다.

 

우리 마을 언덕 위에는 작은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원래 엄마가 오빠 둘을 낳고는 시름시름 앓자, 아버지는 젊은 아내가 걱정돼 굿을 했다. 무병이니 무당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날로 앞장서서 마을에 교회를 들였다. 몇몇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 손수 벽돌을 찍어 교회 건물을 올렸는데, 농한기에만 건축하느라 몇 년이 걸렸다. 아버지는 그만큼 교회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고 교회 일에 적극적이었다.

장손이었지만 교회를 다니고부터는 제사상에 절을 하지 않자 할아버지와 친척들은 무척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했고 심지어 교회 완공이 늦어지자,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 집 잠실(누에 치는 곳)을 임시예배 공간으로 내어주기도 하였다.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친척들과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할아버지와 드센 다섯 고모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에게 분풀이하곤 하였다.

 

어느 따뜻한 봄날,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른들은 들일 하러 나가고 집안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이 무료해 자연스레 발길은 교회로 향했다. 교회 아래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빨간 교회 지붕과 몽실몽실 피어난 하얀 구름이 그 안에 담길 때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교회에 도착하자 교회 어른들이 했던 것처럼 내 키만 한 큰 빗자루로 교회 안팎을 깨끗이 쓸었다. 흙바닥 그대로인 넓은 마당을 어린 내가 쓴다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수돗가에 가서 걸레에 물을 묻혀 와서는 엉덩이를 하늘로 들고 열심히 예배당 안을 이리저리 깨끗이 닦았다. 그렇게 한참 애를 쓴 후 내가 깨끗하게 쓸어놓은 마당을 화단 한구석에 앉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산에는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화단에는 키 작은 채송화와 이름 모를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착한 일을 한 나 스스로가 대견해 우쭐했을 수도 있었다.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의 땀을 식혀주었고, 뻐꾸기 울음소리가 온 산과 마을에 교회 종소리처럼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사위 四圍 고요한 것이 어린 마음에 그것은 너무나 거룩하고 강렬한 느낌이었다. 가족들의 고함과 짜증 섞인 말투로 언제나 시끄러운 집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그 기막힌 고요함에 스며들고 말았다.

어른들이 말하는 천국이 이런 것일까? 앞으로 나는 무엇이 될까? 내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그래도 나는 이렇게 대자연 속에서 나만의 행복한 삶을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

 

그 경험은 아직도 내게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물아일체의 경지를 맛본 것 같다고 해야 할까? 4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그때의 바람결, 마당을 비추던 햇살의 따스함, 종소리와 같이 퍼지던 뻐꾸기 소리와 코끝을 간질이던 향긋한 꽃향기 모두가 선명하다. 그때의 강렬한 인상이 댐 수몰로 인해 고향을 떠나 도시빈민으로 아웃사이더 같은 삶을 살았던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외로울 때마다 나를 푸근히 안아주었던 고향과 자연을 생각하면 애착 인형처럼 안정감을 주었다. 고향은 나의 기억 속에 원형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몇 년 전, 오랜 경력 단절을 이겨내고 어렵게 입사한 직장에서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와 엄마의 병환, 나의 갱년기 증상으로 인해 탈진되어 얼마간 일을 쉬게 되었다. 걸음도 잘 걷지 못했던 나를 일으킨 것은 살기 위해 나간 산책길에서 내 육신에 축복처럼 내리쬐는 늦가을의 햇살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귀한 햇볕을 고루 나누어 주는 자연이 너무도 고마워 손가락 마디마디를 조심스레 펴서 햇빛을 어루만졌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와 육신의 지침으로 외로웠던 가슴이 서서히 따뜻하게 데워져 온몸 구석구석으로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의 개학이 다가오자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이들의 진학과 진로, 그리고 직장에서의 업무에 대한 중압감 등 모든 것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얼마간의 휴가를 다녀왔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유별난 고향 사랑이라는 타박을 들으면서도 고향 가는 길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내가 살던 고향은 물이 차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마을 아래가 낚시터로 변한 외갓집 동네는 반쯤 그대로 남아 있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겨울이 봄 더러 조금만 더 있다 간다고 떼를 쓰는 듯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나는 물끄러미 물을 바라보았다. 어느 때보다 만수인 시퍼런 강물은 사파이어의 빛깔처럼 오묘하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어떤 시인은 수중 궁궐이 된 자신의 고향을 그렇게 노래했다.

 

내 고향, 그 빛이 너무도 고와 그 빛 너무 눈 부셔 시샘한 수궁이 데려갔노라..

- 김사인, 아이들이 고향을 묻거든일부분 중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서 물속 나의 고향을 생각했다.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밀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 뜨거운 것이 내 허한 마음속 냉랭한 깊은 곳까지 들어가 조금씩 스며 들었다. 그제야 세찬 바람에 정신이 차려졌다. 괜찮다, 괜찮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그리운 고향, 고향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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