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동률
심희옥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요?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답니다. 가수였어요. 제가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그를 처음 본 건 열여덟 살 때였어요. 그 전에 선생님을 좋아한 적이 있었지만, 다 크고 성인이 되어서는 첫사랑이었죠.
간밤에 김동률의 노래를 들으며 잠이 들었어요. 그를 그리면서 잠이 들어서였을까요. 그는 나에게 “너는 내 짝이 될 수 없어”라며 말했습니다. 그가 나의 옆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어루만졌지만, 뒷모습을 보이며 “너는 내 짝으론 안돼!”라고 단호하게 말을 하고 휑하니 어디론가 떠나 버렸어요. REM 수면에 빠진 건가 싶기도 했어요. 하도 움직여서였는지 눈이 아팠습니다. 꿈에서 그를 봐서 너무 반가웠지만 순간 아주 슬펐어요.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체념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한 분야에 대가를 이룬 가수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고, 그의 모든 노래에 심취하는 행위는 어쩌면 순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를 좋아한 지 올해로 스물세 해가 되었어요. 성년이 되고 나서부터 연애도 안 하고, 쭉 이 사람만을 일편단심으로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동안 이 사람으로 인해서 크고 작은 일로 무늬를 이루며 세월에 휩쓸려 여기까지 왔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적 행보를 응원하는 팬으로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저를 악당이라 생각해서였는지 혹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제 행동에 경고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선이 굵은 첼로처럼 중저음의 보이스와 높은 음역대를 넘나드는 목소리를 가진 아티스트입니다. 낮게 이야기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는 듯해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오빠만 같았어요. 그래서 그는 뭇 여성들의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수려한 현대판 오르페우스를 닮았습니다.
그의 음반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동행』 앨범입니다. 음반 포스터를 액자에 끼워서 방안에 걸었는데요. 언제나 제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배치할 만큼 저는 그 음반을 좋아합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 팬들은 Wish List라고 부를 정도로 이 앨범을 지지합니다. 감상을 설명해 보자면, 일단 「고백」은 처음 들었을 때 새벽이 생각나는 분위기에서 살짝 몽환적인 부분도 떠올리게 합니다. 두 남녀의 로맨틱한 장면을 서정적인 노랫말과 멜로디로 가득 채우고 영원히 하나가 되자는 내용은 우리를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해요. 이 노래 다음으로 「청춘」이 나오는데, 그와 나는 서로의 봄을 다 지켜보았어요.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제 시간이 흘러서 나오는 노래를 다시 듣고 있으니, 그와 나의 어제와 오늘이 참 슬픈 것만 같습니다. 다음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기도 한 「내 사람」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올 때 정말 힘이 되었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여인을 관찰하면서 정말로 있을 법하지만, 거기서 느끼는 화자의 감정이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노랫말은 마치 그가 손을 잡고 위로해주는 것 같았어요.
조금 건너뛰어서 「내 마음은」이라는 노래는 후렴구가 간절합니다. ‘내 마음은 언제나 그 자리, 내 마음은 아직도 네 곁에’가 반복돼요. 약간 극적이기도 한 노래의 파도가 듣는 이의 감정도 휘몰아치게 합니다. 드라마틱한 악상의 전개가 다른 삶을 사는 여자가 금방이라도 달려올 거 같아요. 이 노래는 2023년도 콘서트 때 공연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노래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곡은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오늘」이라는 노래가 기다리고 있어요. 전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영화 「위대한 유산」 「사랑해, 파리」로 유명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로마」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내용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자신을 길러준 보모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녀는 한 나쁜 남자를 사랑하면서 아이를 잉태하지만, 그 남자는 보모의 배에 총을 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병원에 급히 가서 아이를 낳았어요. 사산아가 태어나 그 보모에게 시련을 주는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가수 존박의 추천으로 봤지만, 저의 내면에 충격을 준 작품으로 적잖이 힘들어했어요. 「오늘」이라는 노래와 내용 면에서는 다르지만, 그만큼 비애가 있습니다. 10번 트랙은 앨범 제목과 동명인 「동행」이에요. 처음에 노랫말을 듣고 세상 누군가 이런 위로를 해주며 동행하자고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까 싶어서 듣고 많이 울기도 울었습니다. 가끔 사랑이 아니라고 몇 번을 저만치 도망갔다가 내가 너무 뜨거워서 지친 게 아닌지 라는 깨달음을 가져왔던 어느 날 그는 늘 그 자리에서 날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왔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품어주었던 사람이었어요.
『동행』 앨범을 제가 베스트로 꼽은 것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관찰하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만든 이 노래들이 청자에게 진솔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 시기가 절정이었어요. 누가 그의 노래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동행』 앨범을 첫손가락에 꼽고 싶네요. 그러나, 아마 그는 자신의 노래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로 솔로 1집에 있는 「동반자」를 꼽을 것 같아요. 더 진한 그의 스토리와 진정성이 담겨 있어서 그의 부친도 이 노래를 다 부를 정도라고 하네요. 그가 예전에 사귀었던 여인에 대한 노래여서 저보다 먼저 김동률을 만났던 이름 모르는 그녀를 부러워한 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어느덧 세상을 현실적으로 봐서 생각하는 범위가 좁아졌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어느 정도 체념이 되었지만 사랑의 역사를 모래성처럼 허물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누군가를 다시 사랑해도, 그에게서 처음으로 느꼈던 일련의 똑같은 감정의 파고를 거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청춘의 시기에 많이 아팠고, 그만큼 상처도 받았으며, 너무 사랑했으니까요.
문득 문덕수의 시 「풀잎」이 떠오릅니다. 「풀잎」을 낭송해보자면 전문은 이렇습니다.
나는 아무런 바람이 없네./ 그대 가슴 꽃밭의 후미진 구석에/ 가녀린 하나 풀잎으로 돋아나/그대 숨결 끝에 천년인 듯 살랑거리고/ 글썽이는 눈물의 이슬에 젖어/ 그대 눈짓에 반짝이다가/어느 늦가을 자취없이 시들어 죽으리./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지금은 전생의 숲속을 헤메는 한 점의 바람/ 그대 품 속에 묻히지 못한 씨앗이네.
천년처럼 함께 해왔지만 그 사람 마음속에 묻히지 못한 씨앗! 같이 밥을 먹으며 몰려오는 고난 속에 역경을 함께 헤쳐 나아갈 수 있다면…. 이 시는 비극적 사랑을 노래하고 있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철없던 시절의 낭만인 듯하여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도 그를 좋아해요. 현재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를 멀리서 응원하는 것밖에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