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한 여행
전혜숙
고민이 생겼다. 올여름 휴가를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우선 올 초부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여름쯤 혈액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의 병간호로 인해 가족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청주에서 대전까지 일주일에 한 번 통원 치료를 위해 오빠들과 여동생이 수고를 하고 있어서 나만 휴가를 가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휴가를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휴일에도 특별 근무를 하고 며칠씩 아버지 야간 간병까지 하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다. 그리고 근무하는 직장이 8월 말쯤 이전을 하게 되어 여러모로 바쁠 테니 휴가 없이 연말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반복되는 일상과 지친 삶에 여유와 약간의 긴장감을 주고 싶었다.
남편과 고심 끝에 3박4일의 일본 자유여행을 실행해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평소엔 연로한 부모님이 걱정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하였지만 여행 중에는 어쩔 수 없었다. 일이 바빠 며칠 통화가 어려울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미리 말씀을 드렸다.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켰다.
여행지는 작년 친정 가족들과 다녀왔던 일본 소도시 ‘다카마쓰’로 정했다. 사정이 있어 혼자만 여행에서 빠졌던 남편이 아쉬워도 했고, 나오시마섬 미술관 투어를 다시 한번 하고 싶었다.
그즈음 뉴스에서는 일본이 태풍과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가 있다고 연신 보도했다. 걱정은 되었지만, 미련이 남아 여행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막상 일본에 도착해보니 태풍과 지진은 문제가 없었지만, 높은 습도와 8월의 작렬하는 뜨거운 햇빛으로 인해 거리를 다니기가 어려웠다. 작년 7월 날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방문한 8월 15일은 일본의 대명절인 오봉(추석)절 연휴여서 어딜 가도 전통 복장을 하거나 검은색 옷을 입은 남녀노소로 넘쳐났다. 일본어도 서툴러 마을버스도 타지 못하고 마냥 걸었다. 말 그대로 걸어서 일본 속으로 여행이었다. 그래도 ‘여행 와서 하는 고생은 행복이다’라는 생각으로 첫날은 즐겁기만 하였다. 우연히 들른 음식점에서 먹은 붓카케 우동과 시원한 맥주는 허기와 더위를 한 방에 날려주어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일본인은-노인들까지도-땡볕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면서도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긴 손매 옷차림에도 그런 더위는 일상이라는 듯 인내심과 여유 있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 이런 날씨 속에 섬 여행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여행 일정을 서둘러 조정하였다. 다카마쓰에서 한 시간가량 열차를 갈아타고 간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전통가옥과 고즈넉한 운하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예전 창고나 건물을 리모델링해 상점이나 음식점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일본 전통미를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들이 많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36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겹겹이 옷을 끼여 입고 연신 미소를 짓는 신랑 신부가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였다.
우리가 묵은 호텔 맨 위층에 온탕, 냉탕, 노천탕이 하나씩 있는 작은 규모의 목욕탕이 있었다. 소박하지만 일본풍의 정원으로 잘 꾸며진 노천탕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즐기는 온천욕은 더없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더위에 지친 몸을 뜨끈한 물에 담그면 여독을 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이번 여행은 수고한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호텔 조식보다는 현지식을 체험하고 싶어 알아보다가 호텔 앞에 있는 작은 빵집을 발견하였다.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하고 맛있는 빵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매일 아침 들르는 재미가 있어 좋았다. 평소에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른 아침 달콤한 빵 냄새와 함께 열심히 빵을 만들고 판매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자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특히 블루베리 조림이 들어간 파이는 하루에 몇 개씩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아버지와 여동생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수도 없이 와 있었다. 출발 당일 데이터만 되는 유심을 구입해 통화가 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아버지는 며칠 동안 연락이 되지 않자, 큰일이 났다며 여동생에게도 연락한 것이다. 나는 핸드폰이 고장이 났다고 둘러대면서도 혼자만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죄송스러웠다. 한편 아버지의 과한 딸 사랑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걱정해 주는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생도 부산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고 하였다.
일본에서 행복한 휴가를 보내고 돌아와 맛집 투어로 늘어난 체중과 강렬한 햇빛으로 인해 피부가 예민해져서 한동안 힘들었지만 다녀오길 잘했다. 역시 여행은 사람에게 여유와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어 준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여행이란 마르셀 프루스트(프랑스 대문호. 1900~1900)의 말처럼 새로운 것을 보는 즐거움 보다는 약간의 여유로움을 통해 안온한 내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돌아오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