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를 추억하다
전혜숙
지난여름 남편과 함께 휴가를 고민하다가 우리만의 호캉스를 가기로 했다. 휴가는 본래 사람을 피해 가야 진정한 휴가라고 생각되어 사람이 붐비는 휴가지 대신 도심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평소에 미술관 관람이 취미인 나를 배려해 남편은 인사동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오랜만에 직장과 아이들을 뒤로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인사동은 휴가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상과 달리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코로나가 공식적으로 끝난 첫 여름이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일단 호텔에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가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인사동은 도처에 미술관과 전시관이 많았다. 다양한 전시를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문제는 찜통더위와 높은 습도였다.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이른 저녁을 먹은 후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서둘러 북촌 한옥 마을을 구경한 후 전날 시간을 놓쳐 들르지 못한 경인미술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 알려진 박영효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증축과 개축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종로 한가운데 그토록 초록의 넓은 정원을 가진 미술관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미술관 지붕 위로 화려하게 피어있는 주홍의 능소화가 초록의 미술관과 잘 어울렸다.
미술관을 둘러보다가 김동수 작가의 「CARE-엄마의 삶, 그리고 포도」라는 전시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전시장 입구에 포도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설명한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포도 농장을 하는 부모님을 도와 종종 포도 포장을 하였는데, 엄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입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힘든 포도 농사를 그만하라고 포도나무를 모두 뽑아버렸다. 한동안 포도는 엄마에 대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흰 종이로 곱게 포장된 포도가 눈에 들어왔는데, 질리도록 많이 포장했던 기억과 함께 다닥다닥 붙어있는 포도알들을 보호해 주려고 감싼 종이가 엄마 같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자식을 위해 살아온 엄마의 삶과 사랑이 오롯이 느껴져 삶의 희망을 포도로 매개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의 진정성 있는 에피소드가 무척 흥미로웠다. 그림 속의 포도는 모두 포도계의 ‘로열패밀리’라고 해야 할 만큼 싱싱하고 탐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달콤한 향이 날 것 같아 보는 내내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때 익숙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학창 시절 엄마는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했다. 우리 집은 시장 중간쯤의 허름한 연립 1층이었는데 살림집과 가게를 겸했기 때문에 늘 시끄러웠다. 여름이면 다양한 과일의 달콤한 향이 진동했는데, 성하고 예쁜 과일은 팔아야 해서 늘 팔다가 남거나 흠 많은 과일을 주로 먹었다. 한동안 내게 과일은 달콤한 향과 함께 썩어서 나는 시큼털털한 냄새와 고단한 엄마의 삶으로 기억되었다. 특히 포도는 잘 물러서 조심히 다루어야 하고 빨리 팔지 않으면 상해서 상품성이 떨어진다.
중학교 때로 기억된다. 평소에 아파도 내색을 잘 하지 않던 엄마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다. 가족들은 빨리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엄마는 떼다 놓은 포도를 팔아야 한다며 참고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맹장이 터지는 바람에 정말 큰 일이 날 뻔하였다. 당연히 오랫동안 가게 문을 닫아야 했고 물러터진 포도는 모두 버려야 했다.
많은 포도 그림 중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다. 바로 「CARE-남매」라는 작품으로 다양한 색깔의 탐스러운 포도 4송이가 흰 종이에 정성스럽게 싸여 있는 그림이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저마다의 향기와 색깔을 뽐내는 것 같았다.
예쁜 포도 4송이가 우리 4형제 같았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만 짓다가 고향이 충주댐으로 수몰이 되어 청주로 떠나왔다. 가진 것 없이 정착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쓰는 고된 일이었다. 아버지는 힘든 노동일로 인해 술을 많이 의지했는데 그것 때문에 가족 모두가 힘들었다. 나와 형제들은 불화하는 부모님을 보며 행복한 성장기를 보낼 수 없었다. 불우한 가정 환경을 탓하며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도 결혼을 해 아이들을 낳고 기르다 보니 이제야 부모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림을 보며 우리 집 3남매도 각자의 개성대로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환경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절망을 가져온다고 한다. 나는 완벽한 환경이 되어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환경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면 절망은 없었을 것이다. 완벽한 환경이란 애초에 없거나 아주 작은 순간에 불과한데, 그 작은 순간만 제외하고는 인생 전체가 불행하다고 느꼈다.
이제는 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마주하고 있는 평범한 환경이 신이 나에게 주신 공평하지만 위대한 선물이라는 것을…
작가의 변
저는 시간이 되면 미술관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름휴가 때 우연히 들린 경인미술관에서 포도 그림을 보며 옛 추억에 젖어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포도의 추억을 선물해 준 작가님이 고마워 메일로 감사의 인사도 드렸습니다. 저도 누구에겐가 치유가 되고 추억을 상기해 주는 귀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