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여사 해방 일기
류승하
김순애 여사의 인생 약사略史를 좀 풀어놓겠다. 여사의 인생을 압축하자면 끝없는 노동과 보상 없는 책임, 그리고 해방에 대한 갈망이라 할 수 있겠다. 고생길은 일찍이 막냇동생을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여상을 중퇴당하고부터 시작됐다. 중학생 나이를 갓 벗어나 방적 공장 교대 근무에 시달리면서 월급 대부분을 써보지도 못하고 뺏겼다고 했다. 따지자면 이는 엄연한 집안의 장녀인 김 여사의 언니, 그러니까 내게 큰이모인 사람도 감당해야 할 일이었겠으나, 김 여사 표현으로는 “일찍이 연애 바람이 나 결혼해 서방 만나러 가버렸으므로” 집안 대소사에 여사의 청춘과 월급만 그만 저당 잡힌 것이다. 이 갑갑함이 얼마나 진이 빠질 정도였냐면, 외할아버지가 여사도 큰이모처럼 도망갈까 싶어 귀가 예정 시간 5분 전부터 오나 안 오나 집 앞에 지키고 서 있다가 잠시라도 늦으면 “가시나가 헛바람이 든다”며 서럽게 매질을 했다는 거다.
그 꼴이 싫어 중매로 일찍 결혼하고도 가난으로 공장은 미처 벗어나지 못해, 갓난아기를 공장에 업어다 기계 한쪽에 줄로 발을 묶어 눕혀놓고 밤을 새워야 했다. 또 그 과정에서 김 여사는 왼손 엄지가 잘렸다 붙어 평생 굽혔다 펴지 못하게 됐다. 하나 더 억울한 것은 이러면서도 빠짐없이 시댁 명절 준비에 동원돼 수십 년을 전 부치는 기계로 산 것인데, 큰아버지 이혼 등으로 집 안에 며느리가 여사 말고 남지 않으면서 맏며느리 노릇까지 떠맡아야 했다. 여사가 이에 대해 시댁에서 일절 보상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여사는 내가 좀 억울하지 않으냐고 물을 때마다 “세상사 그럴 수도 있는 법이다”라고 넘기곤 했는데, 사실 이 안에 강한 해방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음은 최근에야 알 수 있었다.
그 갈망은 내 아버지가 몇 년 전 돌아가고부터 비로소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장례 절차를 끝낸 후 여사가 돌연 “나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더 이상 제사를 안 도와주겠다”며 시집과 대차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네 아버지가 남긴 돈으로” 이제까지 못 다녔던 데를 다 구경해봐야겠다며 계절마다 자식들과의 여행 계획을 줄줄이 잡기 시작했다. 이른바 ‘해방 여행’인 셈인데, 그 과정에서 김 여사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여행지에서 낮술을 거침없이 들이켜더니 남편과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여동생에게 “네가 사별은 해봤냐”며 전에 없이 감정을 ‘팩폭’ 수준으로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시댁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전화를 했는데 “서울 놀러 가야 돼서 어차피 못 간다”고 대차게 질렀단다. 김 여사는 이렇게 말하고서 진짜 작은고모까지 데리고 서울로 걸음했고 자식들을 끌고 인사동에 명동에 롯데·신세계 백화점을 안방처럼 훑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올 추석에는 드디어 해방의 마지막 단추를 끼웠다. 사실 그렇게 여행을 쏘다녀도 명절에 하루 정도는 대구에 남아 시댁에 인사치레는 하는 것이 철칙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마저도 관둔 것이다. 여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식들이 모는 차 뒷좌석에 좌정해 강원도 양양 하조대로, 가평 숲속 리조트로 훨훨 날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몇 년을 모은 가족 곗돈 200만 원이 있으니 돈 걱정은 하지 말라”는 호기로운 말과 함께 온 힘을 다해 놀겠노라 선언했다. 그 말처럼 여사는 하조대 펜션에서는 빔 프로젝터로 이찬원 트로트를 틀어놓고 춤을 추고 와인을 연거푸 마시다, 바닷가로 달려 나가 어린아이처럼 모래에 낙서를 하고 모래밭을 달렸다. 가평 리조트에서는 밤에는 별을 보고 아침에는 산책을 나가 햇밤을 한 봉지 주워 담고, 지나는 국도변에서 갑자기 차를 세워 옥수수를 한 아름 사서 씹었다. 배달료를 만 원씩 주고 야밤에 치킨을 시켜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이럴 때마다 김 여사는 약간의 방어기제로 “너희 덕분에 이런 데도 와보고 행복하다”며 자식에게 공을 돌렸지만, 그럼에도 여사가 비로소 모든 짐에서 해방돼 진정한 자신을 찾아간다는 느낌은 확실히 받을 수 있었다. 짠함과 기쁨이 뒤섞여 와인잔을 타고 내렸다.
여행을 마친 뒤에 대구 집으로 돌아간 김 여사는 “시댁에 명절 간 들여다보지 못해 미안하다며 커피믹스 180개 들이 한 박스를 사 들고 인사를 갔다 왔다”고 카카오톡 단톡방에 알렸다. 그런데 그러면서 동시에 “다음에는 어디로 놀러 갈까? 한강 다리 야경을 보러 갈까?”라고 물어왔다. 여사는 엄마도, 며느리도 아닌 김순애로서 올해에야 물오른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가 가기 전에 김 여사와 한강 다리 야경을 반드시 구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