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나선 시간들
황 인 양
모든 삶이 그렇듯 내 삶 또한 순간의 선택과 집중의 연속이었다. 고단했지만 열정이 있었던 순간들이 괜찮은 기억으로 남아 있으나 모든 면에서 나는 미숙하기만 했다. 그것을 인정하고 가는 것이 지금은 제일 중요하지 싶다. 내 나이 올해 마흔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화에서 살다가 한 여대에 입학하면서 독립을 하여 나에겐 꽤 고된 첫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올라올 정도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어느 순간부터는 힘든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또 이야기를 한다 해도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소소한 고민들이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나를 떠나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내 경험으로 그들의 고충을 따스하게 위로해 줄 수 있게 된다면 이것 또한 값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위안할 뿐이다.
집안 사정상 거주지가 학교와 꽤 멀었거니와 지금은 도로 사정이 매우 좋아졌지만 지하철역까지 가는 버스는 항상 만원에 길이 막혀 매일같이 왕복 네 시간동안 시달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고, 버스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늦은 저녁 집에 와서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올 정도로 통학 자체가 고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단지 몸이 고된 일일뿐이었을지 모른다. 대학은 고향에서 혼자 오기도 했거니와 눈 씻고 찾아봐도 주변 사정 잘 아는 지인이 없어서 모든 소소한 생활을 스스로 찾아 해야만 했다. 모든 삶이 낯설었고 이질감을 느꼈다. 몸은 고됐고 가슴은 항상 먹먹했다. 그 때 처음으로 외로움이란 감정을 깊이 느꼈다.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대 특성상 이미 집안끼리 결혼 약속도 하여 인생고민 없이 사는 친구도 있었고, 집안 여력이 되어 수백만원짜리 명품가방을 가지고 다니느라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화장실을 갈 때에도 가방을 들고 다니는 친구들은 대학생활을 꽤 여유 있게 즐겼다. 학과 공부를 정말 잘 하는 똑똑한 친구들은 징글징글 독하게 공부하면서 교수님의 신임을 얻어갔으며, 아버지가 경영자인 친구는 앞으로 경영을 이을 것이라며 취업 걱정이나 진로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잡지를 한권 가져와 본인 집이라며 보여준 친구는 과 공부에 상관없이 인테리어에 목숨을 걸었다.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영특한 아이었더라면 그들의 삶을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다면 그 속에서 차별화되는 나만의 경쟁력을 가질만한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을지 모른다. 그저 적응하느라 바빴고, 여러 가지로 여유가 없었고 그렇게 똑똑하지도, 배움도 그에 차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 삶의 방향을 잃고 개똥철학에 파묻혀 살아갈 때면 이제는 주변부터 살펴본다. 모든 것이 내가 있는 현재 여기에서 출발한다. 부딪쳐보면 알게 된다. 지금 얼마나 부족한지. 그래서 평생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보다.
학교 앞은 매우 화려했다. 젊음의 거리로 각종 상업 시설과 도시적인 문화의 거리 그 자체였다. 집이 멀었던지라 아침 일찍 나온 날이면 지하철역 앞에 있는 KFC의 비스킷 하나 사먹으며 창문가에 앉아 등교하는 학생들 무리를 무심히 바라보곤 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세련미가 물씬 풍기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그런 모습이 예뻐 보여 나도 화장하는 법에 관심을 가지며 한동안 밤마다 거울 앞에 앉아 눈썹을 그렸다 지웠다하며 열을 올렸다. 게다가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있는 미용실을 찾아다니며 유행하는 파마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물욕도 별로 없는 나에게 그것들은 기분전환 정도의 일시적인 쾌락일 뿐이었지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쯤 긴 학과 공부에 적응이 되어갔다. 공부 경험은 내게 한계를 알게 해 주었다. 나의 뇌는 그렇게 쫄깃한 녀석은 아니었다. 미친 듯이 공부하는 친구들은 유행하는 파마를 하지 않아도, 세련미가 눈 꼼만큼 없어도 그들만의 멋이 있었다. 아쉽게도 깊이 파보는 과정은 내게 매우 어려웠다. 단지 작은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배움이 재미있다는 생각은 이렇게 시작됐다. 풍만해지는 느낌과 무언가 깨달아가는 느낌 이것이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대학생활에서 가장 재밌는 일은 단연 미팅이었다. 여대에서 미팅은 어쩌다 한번 있는 이벤트가 아니라 곧 삶이다. 과대의 주요 임무는 오직 미팅 건수 잘 물어오기였는데 우리 과대는 이 부분에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해 주었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 칠판에 상대학교/학과/인원수를 나열하고 참가인원을 모았다. 그 덕으로 내 다이어리는 미팅 스케줄로 꽉 채워졌고 삼삼오오 모여서 나가 재미있게 놀았던 생활들이 이후 과에서 잘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게 된 주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때 과대 임무를 잘 수행했던 그 친구는 지금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미팅건수 물어오는 그녀의 실력이라면 곧 잘 하겠지 싶다.
하지만 그곳에선 머피의 법칙이 항상 성립했다. 어느 날 그나마 맘에 드는 녀석이 있기에 여럿이 같이 고구마 맛탕을 먹으러 갔는데, 먹질 않기에 물었더니만 고구마를 먹으면 목이 메어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며 못 먹는다고 했다. 둘 중 하나였다. 나를 무척 마음에 안 들어 하거나 고구마도 못 먹을 만큼 엄청 찌질한 놈이거나. 어디서 뭐 하고 사나 모르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있길. 어쨌든 미팅은 남자를 고르는 데도 사람을 사귀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귀한 경험으로 내게 남았으니 그러고 보면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세상엔 쓸모없는 경험은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매사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가짐은 중하다. 이런 생각은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있어 가장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글을 쓰며 마흔을 시작할 수 있어 기쁜 마음이 든다. 어린아이가 방 한 구석에 이불 동굴을 만들어 놓은 것 마냥, 학창시절 동아리 방처럼 그 곳에서 인생 고민도 하고 고단할 땐 잠도 자고, 가슴 아픈 일이 있을 땐 울기도 하는 것처럼 앞으로도 이 활동으로 작은 위안을 느끼고 싶다.
2017.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