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김민영
“여보, 이것 봐. 내 가슴에 이렇게 만족하는 남자는 처음이야.”
“그래, 조오-켔다아-.”
품 안에서 젖을 빨며 기분 좋게 선잠이 든 돌쟁이 아들을 두고 하기엔 걸맞지않을 농이었는데 다행히 남편은 쉬이 넘겨주었다. 이젠 젖을 물리는 동안 실 없는 농담을 할 여유도 생겼지만 독박육아에 매여있던 지난 일 년이 사실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니, 임신 초기부터 시작해서 임신 기간 내내 밤낮없이 헛구역질을 하게 만들고 결국 유도분만 직전까지 함께 했던 입덧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다. ‘노산’이란 칭호는 가까스로 피했다지만 30대 중반의 준비되지 않았던 초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먹는 입덧’이어서 살도 많이 찐데다 평생 없던 기미도 잔뜩 얻었다. 출산 후에는 급성 고혈압까지 와서 젖만 물리면 눈앞이 하얘졌다. 그럼에도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하다.’라는 말이 틀린 데가 없다고 생각될만큼 육아는 배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사람이 성장하는데 이렇게나 많은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밤낮 없이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달래느라 쪽잠조차 황송할 지경이었다. 가장 힘든 것은 수유였다. 조리원에 있을 당시 고혈압때문에 수유를 금지 당해 초기에 길을 들이지 못한 탓으로 젖 양이 충분치 않아 아기는 늘 배를 곯다 울어댔고, 익숙하지 않은 수유 자세로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젖을 먹여보려 애쓰다 결국 둘 다 지친 상태에서 분유를 먹이고 함께 골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보상심리인지 오뉴월 날씨만큼 변덕스러워진 입맛에 매번 다른 먹거리를 임신 때보다 더 열심히 사다 나르던 남편의 자상함도 젖의 양을 늘려주진 않았다. 차라리 모유수유를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았지만 자연분만을 못했으니 젖이라도 꼭 먹여야 한다는 자의 반, 타의 반의 결의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기가 잠들면 남편에게 맡기고 ‘오케타니’니, ‘모유수유협회’니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마사지를 받고 젖 먹이는 자세도 교정하고, 젖 양을 늘려준다는 음식들도 일부러 찾아가며 먹었지만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어려웠고 모든 일에 서툴렀다. 늘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잠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불면증이 뒤따랐다. 옛날같았으면 줄줄이 대여섯도 예사로 낳고 키웠다는데, 꼴랑 하나 낳아 기르면서 이렇게나 힘이 부칠 줄이야- 세상에 나 하나만 덩그러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결국 나를 가장 도운 것은 시간이었다. 어느덧 나는 수유 방법 중 제일 귀찮다는 혼합수유에 익숙해졌고, 아이는 고맙게도 그 흔한 유두 혼동 같은 것도 없이 모유건 분유건 주는대로 잘 먹었다. 조금 더 잘 수 있게 되었고, 아이를 내려놓고 화장실 정도는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었다. 그 후,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또 한 차례 작은 파도가 쓸고갔지만 나름 잘 넘긴 것 같다. 아니, 실은 그때도 힘든건 마찬가지였다. 나날이 무거워지는 아이를 안아주느라 가뜩이나 아픈 손목이, 묵혀놓은 푸드 프로세서니 도깨비 방망이니 하는 것들은 쓸 생각도 못하고 이유식 재료를 요령없이 다지느라 완전히 망가졌다. 나중에서야 그 꼴을 본 남편이 왜 살림 도구 놔두고 손으로 다지고 있느냐고 하길래, 무안함에 ‘애를 낳고나니 총기를 잃어서 그렇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파스 따위나 붙이며 버티다가 어느 날 새벽 눈을 뜨니 손목이 너무 아파 어디 금이라도 간 줄 알고 응급실에서 엑스레이까지 찍었더랬다. 통증으로 냉장고 문을 여는 것도, 머리를 감는 것도 힘들었다. 어미 사정은 알지도 못하고 이미 손을 타버린 아기는 늘 안아달라고 보챘다. 그럴 때마다 신음이 뒤섞여 흡사 주문이라도 외는 듯한 자장가로 달래며 그저 안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속싸개를 벗은 이후론 가만히 안겨있지도 않아 손목이 이리 꺾이고 저리 꺾였다. 참 신기한 것이 국그릇 하나만 들어도 달달 떨리던 손이 우는 아기를 안아들 때는 한 번 휘청임이 없었다. 보다 못한 친정 부모님이 교대로 들러 아이를 봐주시는 동안 한의원에 다녔는데 일반침은 듣지를 않아 생전 처음 봉침을 맞았다. 아주 10회씩, 20회씩 끊어놓고 맞았다. ‘한의원에서 손목 인대가 다 너덜너덜해졌다더라, 이러다 진짜 장애인 되면 어떡하냐’고 남편 앞에서 얼굴 벌개지도록 울어놓고선, 이제 시간 좀 지났다고 다 잊고 잘 넘겼단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안에선 괴물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알 것 같다가도 하늘과 땅 사이의 형벌을 죄다 받고 있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아이를 축복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다가도 고통의 근원이라 원망하며 저주하기도 했다. 시간이란 강물과 같아서 깊게건 얕게건 그 안에 몸을 적셔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솜처럼 무거워져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 하루하루를, 오로지 나만을 의지하고 있는 작은 존재까지 끌어안고 그저 버텨내야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눈 앞에 다가오기 전까지는 내 편인지 적인지 알 수 없어 이름 붙여졌다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보냈다. 시간만은 내 편이라는 확신조차 할 수 없던 매일을 보내며 가끔 모질었던 친정엄마의 유난히 힘들었을 하루를 이해하게 되었고, 부당하다 느꼈던 아버지의 분노가 실은 내가 아닌 당신 자신을 향했던 것임을 알게되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었던 두 분을 더는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다. 처음은 늘 힘들다. 하물며, 한 생명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오죽하랴! 교수가 되길 원하셨던 부모님의 바람을 그야말로 내치고 뒤늦게 예술을 배우겠다고 들어간 두번째 대학에서 담당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술이 결코 삶보다 우월하거나 우선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영화 한 편 찍는 것이 애 낳고 키우며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 더 의미있거나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당시에는 그저 예술지상주의나 예술가의 선민사상 같은 것을 경계하라는 뜻인줄만 알았는데 지금은 그 의미를 하나 더 알 것 같다.
잠 든 아이가 깰 새라 살그머니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야근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중인 남편을 향해 섰다. 타일 바닥이 제법 차가운 것이 여름도 끝자락이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고도 남편은 별 말이 없었다. 다만 물소리가 잦아들었다. 비누칠을 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남편의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볼 수 있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여보.”
“응.”
“이젠 백 세 시대라는 거, 진짜겠지?”
“아마.”
“내가 앞으로 어떤 멋진 작품을 쓴들, 백 년을 읽히진 못하겠지.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그럴 자신은 없어. 하지만 우리 태오는 별 일이 없는 한 백 년을 살거야. 그치?”
“그럼.”
잦아들었던 물줄기가 다시 세졌다. 거품이 흘러내리는 남편의 등을 보며, 그건 어쩌면 정말 굉장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작품이고, 세상의 엄마 아빠들은 모두 작가다. 우리는 백 년을 살 작품을 만들고 있는 거야. 그러니, 오늘도 참고 힘을 내는 수 밖에.
조금 가까이,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2016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