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강의실 >  창작합평
  오사카 외삼촌    
글쓴이 : 김은미    20-04-07 20:57    조회 : 1,377
   오사카 외삼촌.hwp (36.0K) [0] DATE : 2020-04-07 20:57:10
          

                                                                     오사카 외삼촌

                                                                                                                                                     김 은 미

 

 내가 외삼촌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스무 살 무렵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의 고국인 한국을 방문했다. 외삼촌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나는 처음 본 그가 마냥 좋기만 했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파마머리에 아주 세련되고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 금세 소문이 나서 외삼촌을 보기 위해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는 곳마다 동네 아이들은 졸졸 따라다니고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 하며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시골의 열악한 환경과 음식이 맞지 않았던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급히 보건소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했다.

 외삼촌은 이후에도 외할아버지와 함께 올 때도 있었고 혼자 올 때도 있었다. 평소 부끄럼이 많던 나였지만 왠지 그와는 거리낌이 없었고 가족 중에 가장 친밀했다. 일본어 대화는 어려웠으나 초등학교를 일본에서 마쳤던 아버지의 통역과 서로의 표정과 느낌으로 어느 정도 소통이 됐던 것 같다. 학교 파한 후 넓은 흙 마당에서 같이 놀기도 했고, 돌담이 즐비한 마을 골목을 동네 아이들과 뛰어다니며 쫓고 쫓기는 놀이를 산 그림자가 마을을 덮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함께했다. 이후 고등학생이 되어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 후에는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왕래하다 6년쯤 지나 외삼촌은 외할아버지 뜻에 따라 목포 출신 여자와 선을 본 후 결혼했다. 숙모와 선을 보고 온 날 내게 "목포 여자 No, 삼촌 결혼 No No."라고 하여 그분과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며칠 후 엄마를 통해 들은 소식은 그게 아니었다. 선본 여자와 결혼식을 곧 치를 거라는 얘기였다. 분명 내게 싫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사정을 알 수 없어 답답했지만, 그의 뜻을 엄마께 전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지금까지도 이 얘기는 여동생과 나 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남아있다. 그 후 마음에 없는 여자와 강압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된 그가 늘 걱정이 되었다. 아이 셋을 낳고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엄마를 통해 들었어도 믿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서로의 삶 속에서 잊고 살다가 2017년 엄마가 노인성 치매로 요양병원 입원하기 두 달 전 엄마 방 청소를 하다 보게 된 엄마의 낡은 수첩에서 일본 동생이라고 적힌 외삼촌의 집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엄마와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바로 국제전화를 했다. 통화는 엄마와 외숙모가 했고 외삼촌은 퇴근 전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외삼촌의 집 전화번호를 아주 소중하게 메모했다.

 이후 마음속에 담은 채로 바삐 지내다 2018년 초가을 일본열도에 큰 지진이 발생해 피해가 크다는 보도를 접했다. 다행히 오사카 쪽은 별 피해가 없다고 하였으나 연락처를 알고 있던 터라 걱정이 되어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외숙모는 내 존재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외삼촌은 집에 없었다. 그녀와 장시간 국제 전화를 하고 별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주고받았다. 그날 밤 외삼촌한테서 연락이 왔다.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서로가 얼마나 들떴는지 대화가 되지 않아 이름만 부르다 외숙모와 다시 통화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외삼촌의 생일이었다. 외삼촌은 내 생애 가장 큰 선물이다. 먼저 연락을 해줘서 정말 고맙다라고 하면서 몹시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내 부모님, 즉 그의 누나 부부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얘기며 현재 엄마가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조심스럽게 소식을 전했다.

 그때, 전화기 너머로 그의 통곡 소리가 내 가슴에 먹먹하게 들려왔다. 며칠 후 외삼촌은 외숙모와 함께 무안 공항을 이용하여 목포에 와서 엄마를 만나고 이틀 후에 갔다. 내가 외삼촌을 만나러 목포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그는 조만간 오사카로 오라고만 하면서 한사코 나를 말렸다. 나는 서운한 마음에 입을 삐쭉거렸다. 그나마 작은아들 제대 기념으로 오사카 여행을 이미 약속했던 터라 서운한 마음을 다소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외삼촌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결혼하고 6년 후였다. 집안 행사로 방문했을 때 김포공항에서 만나 목포행 고속버스를 타고 같이 고향에 갔었다. 그러니까 자그마치 30년 만에 외삼촌을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벚꽃이 흩날리던 지난 봄날 간사이공항에 마중 나온 외삼촌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마에 깊게 팬 주름살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대신한듯하여 가슴이 아려 말을 잇지 못했다. 외삼촌은 서툰 한국말로, 나는 몇 개 안 되는 일본어 아는 단어를 총동원하고 번역 앱을 이용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외삼촌은 결혼 전부터 살던 전통 일본식 이층집에서 40년 넘게 살고 있었다. 실속 있고 빈틈없는 내부 구조에 일본인들의 섬세함과 검소함이 느껴졌다. 특이한 점은 주방 바닥에 작은 숨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지진대비 비상식량과 물품을 비축해 둔 곳이었다. 바닥에 붙은 뚜껑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각종 식료품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한 달 정도는 거뜬히 지낼 수 있어 보였다. 꼼꼼한 숙모님은 결혼 초부터 그곳을 항상 가득 채워 놨다고 한다. 나는 저 물건들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하느님께 화살기도를 드렸다.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가 연락하지 않고 살 수 있었는지 세월의 무상함에 서로 안타까워했다. 외삼촌은 숙모님께 미안할 만큼 함께 간 아들을 끔찍이 챙기고 그동안 내게 베풀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기라도 하듯이 최선을 다하였다. 이틀 동안 오사카와 교토의 명소들을 계획했던 대로 보여 주었고 그가 좋아하는 일본 음식을 다 먹여주고 싶다는 듯 무던히 애를 썼다.

 

 그 후 외삼촌은 두 달 간격으로 서울에 왔다. 도착하면 나와 KTX를 이용하여 목포에 내려가 엄마를 만나는 일이 우선이었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외삼촌을 바로 알아보고 다녀간 기억도 며칠 동안은 하였다. 물론 가족이나 지인들은 인지하시지만 다녀간 사람들은 자식들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외삼촌의 기억만은 예외였다. 아픈 엄마에게 그는 아직도 가슴 아픈 애잔한 동생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다섯 살 때 돈 벌어오겠다고 하며 한 살 된 이모와 꽃 같은 외할머니를 두고 일본으로 가셨다. 그렇게 떠난 할아버지가 3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살길이 막막해진 외할머니는 주변의 권유로 엄마와 이모를 데리고 같은 박씨 성을 가진 남자와 재혼을 했다. 귀하게만 자란 엄마는 이모와 함께 천덕꾸러기가 되어 새 외할아버지 시하에 극심한 고생을 하였다.

 내가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일본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말쑥한 차림으로 우리 집에 오셨다. 그때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 할아버지는 나와 오빠가 놀고 있는 집 옆 밭 언덕까지 와서는 무슨 얘기를 하셨는데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를 못하였다. 엄마 이름을 물었던 것 같은데 누구인지도 몰라서 말을 시키면 오빠와 함께 도망만 다녔던 슬픈 기억이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마을 끝자락 언덕 밑에 있는 당신의 딸집까지 찾아오셨을 외할아버지. 두고 간 다섯 살배기 딸의 모습을 상상하며 엄마를 만났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까. 그런 딸이 가정을 이루고 궁색하게 사는 모습을 본 외할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때 엄마와의 상봉은 어렴풋하지만, 기억이 난다. 원망과 그리움이 가득 찼던 아버지를 갑자기 초라한 모습으로 만난 엄마. 엄마와 할아버지는 많이 울었고 아버지도 울었다. 어린 나는 갑자기 일어나는 그 상황을 어리둥절해 하며 엄마가 왜 우는지 몰라서 걱정하며 잤던 것 같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가슴에 담아둔 두 딸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최근에야 외삼촌을 통해 알게 되었다. 술을 마신 날이면 한국에 어린 두 딸을 두고 왔다며 자주 울었다고 한다.

 외삼촌에게도 큰 아픔이 있었다. 여섯 살 때 재일교포였던 생모가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세 번의 수술 끝에 결국 병사했다. 이후 두 부자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엄마는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가 미웠을 텐데도, 그 아픔을 알기에 이복동생을 친동생처럼 우리 동생, 우리 동생하며 늘 애잔해 했다. 외삼촌은 엄마가 '우리 동생'이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을 엄마의 정 깊은 목소리에서 느꼈나 보다.

 외삼촌은 자녀 셋을 모두 출가시키고 손주 다섯을 뒀다. 주말에는 한국인이 많이 다니는 교회에서 회장을 맡아 많은 봉사를 하고 있다. 외숙모와는 화목하게 잘 지내는 듯해서 그동안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요즘 한일관계가 심각하여 외삼촌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내게 언제나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는 정년퇴직 후 재취업을 하여 오사카성에서 코끼리 열차 운전을 하며 관광객을 맞고 있다. 한국 관광객은 외삼촌 담당인데 요즘 찾아오는 한국인이 없어 많이 안타깝다고 한다. 외삼촌은 한국인을 보면 너무 반가워 가까운 친인척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한번은 광주에서 온 네 명의 여자 관광객에게 내 고향이 신안군 안좌면이요 라고 했더니 손뼉을 치면서 함성을 지르며 반겼다고 잔뜩 흥분한 상태에서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오늘도 외삼촌의 바람처럼 한일 관계가 하루빨리 정상화되어 오사카성 코끼리 열차에 보고 싶은 한국인을 가득 태우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고향이야기를 끝없이 하는 모습을 바래본다. (2019.12)

               

     




 
   

김은미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5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 창작합평방 이용 안내 웹지기 02-05 31239
5 슬픈 아버지 김은미 05-09 1118
4 두 할머니 김은미 04-25 1323
3 오사카 외삼촌 김은미 04-07 1378
2 출근도 여행이다 김은미 03-22 321
1 여름 고향은 엄마다 김은미 09-09 1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