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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삼류다.    
글쓴이 : 김인자인    21-01-27 11:18    조회 : 4,428
   나는삼류다(한국산문등재).hwp (19.0K) [0] DATE : 2021-01-27 11:21:07


나는 삼류다

 

김인자

 

속된 말로 나는 삼류다. 개그맨을 이르는 말 중에 남을 웃게 하면서도 자신은 웃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일류, 남을 웃게 하면서 자기도 웃고 마는 사람은 이류, 남을 웃게 하지도 못하면서 나만 웃고 있는 사람은 삼류라고 한다.

 

전 세계를 팬데믹으로 몰아 넣어버린 코로나19로 인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대면 예배가 금지되었다. 남편과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마친 뒤였다. TV를 보며 아침 겸 점심을 막 끝내고 있는데 연말 특집 전국노래자랑에서 어느 가수가 나훈아의 <영영>을 애끓는 소리로 불렀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어떻게 잊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세월 가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아직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나봐/ () 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거야

남편과 점심 설거지를 하면서 음, 박치 열창으로 한참을 따라 부르다가 갑자기 오래전 초등 친구들 노래방 모임에서 일어난 해프닝이 생각났다. 사실 남편 앞에서 노래를 튼 것은 몇 년 전 노래 교실에 한 달 다녀본 후부터 집안에서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슬슬 따라 부르다 보니 음성까지 커지게 되면서 민망스러워지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 그냥 터버린 계기가 되었다.

정년퇴직 후 취미로 색소폰을 배우고 있는 남편과 가끔 노래를 함께 부르며 음정과 박자를 맞춰보기도 한다. 이상한 것은 남편의 음치 박치를 듣고 교정해줄 수 있는 나는 정작 음, 박치인데 남이나 자신이 음, 박치인지도 모르는 남편은 몇 번씩 들어가며 가사와 음을 외워 버리곤 정확하게 따라 부른다. 그것도 아주 잘 부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일이란 것이 정수(定數)뿐이 아니고 이럴 수()나 저럴 수()도 있는 것이라서 더 흥미로운 게 아닌가 싶다.

속옷을 갈아입을 때 남편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거나 손사래를 치며 나가주길 바라는 둥 아직도 못 트고 있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방귀다. 신호가 오면 화장실이나 안방으로 슬그머니 피하든지 여의치 않을 땐 뱃심과 괄약근을 조절하며 가스를 살살 내보내기도 해본다.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급하게 나와 버리는 소리에는 남편과 40년을 같이 살면서도 여전히 편치가 않다. 이런 내 앞에서 엉덩이를 뒤로 빼고 한쪽 다리를 든 채로 마치 귓방망이 한 대 얻어맞은 개구리 모양을 하면서 --’ 해대곤 건강한 방구 소리는 이런 거야하는 남편에게 주책바가지라고 눈을 흘겨대면서도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모습에 웃긴 하지만 여전히 곱상은 아니다.

 

그날 2차 모임 자리가 된 노래방에서 한 친구가 잊으라 했는데하면서 노래를 시작하자 틈만 나면 남편 얘기에 ‘~시다‘~를 붙여가며 애정전선을 줄줄 그어대던 친구가 불쑥 남편을 소환했다. “이 노래는 우리 남편 단골 십팔 번이야.” 아니 이 자리에서 느닷없이 니 남편을 소환하면 어쩌자는 거니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 다른 친구가 니 남편 아직도 못 잊고 있는 여자가 분명히 있는 거네.”

우린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어서 제각각의 방법대로 안면 근육을 굳혀버리거나 과장된 몸짓을 해가며 겨우 마무리를 했다. 그 친구가 남편 자랑할 만도 한 것이, 아내 모임의 주대나 식대를 친히 와서 몇 번 계산해주기도 했고 모임이 끝날 때 가끔 고급승용차로 모셔가기도 했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처가 덕에 법인카드사용이 자유로운 직책에 있다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친구보다는 그 남편에게 감사를 표해주는 것이 둘 모두가 자랑스러워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여우같이 영악한 너그러움으로 시시때때로 소환되는 남편으로부터 흠뻑 사랑받는 여인이라고 인정해 주고 있던 터였다.

마음이 허()할 때 더 하게 된다는 개똥철학 한 구절쯤은 이미 터득했을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릴 수 없는 게 지 자랑인 것 같다. 물론 악의 없이 직선적이고 착한 친구가 한 말이었기에 오해 없이 끝낼 수는 있었다. 부부 모임에선 대중가요의 명곡이라는 이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런 일이 있던 후였다.

사랑도 현실이 되면 색깔이 변하는 건데 현실이 되어버린 사랑 앞에서 옛사랑에 덧칠까지 해가며 영원히 퇴색하지 않겠다는 맹세는 현재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본다. 왕년에 그런 사랑 한두 번쯤 안 해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런 사랑은 적어도 혼자서 은밀하고 내밀하게 살짝살짝 펼쳐보는 마음속 보석 상자에서 퇴색해 가야 하는거 아닌가.

부처님께서 일곱 종류의 아내 중 최고의 아내로 꼽았다는 종 같은 아내인들 옛사랑에 애절한 서방님을 보고 어찌 정성을 다할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어느 때나 일류가 될 수는 없다는 거다. 자리와 때를 모르면 등외품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교회에 다닌 지 3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입술을 열어 말로 하는 기도를 채 1분도 하지 못한다. 두 손을 모아 고개 숙여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 지금까지 내가 나 됨을 허락하심에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신 줄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내 입을 열어 간구하는 모든 것들이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다워도 머리털까지도 세시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 어찌 다 이를 수가 있겠는지요. 내가 아무리 계획하고 이루고자 하여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방법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마주하는 상황들 속에서 내 마음에 감동으로 응답을 주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인도하심이라 믿고 따르겠습니다이러고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인가. 다른 누굴 위해 기도하기는커녕 남에게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하물며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겠다는 경고이지 않나. 이러고 보니 나는 분명 삼류도 안 되는 등외품 신도인 게다. 그런데 등외품으로라도 그분 곁이 좋다.

 

요 며칠 전부터 밥을 먹을 땐 선글라스를 끼고 식탁에 앉는다. “당신이 내 눈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으면 밥맛 떨어질 것 같아서 감춰주는 거예요. 밥맛까지 떨어지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상안검 절개수술을 받았다. 일명 쌍꺼풀 수술이다. 연말 행사들이 모두 취소되거나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연휴를 이용하여 큰맘 먹고 통과의례 같았던 행사를 치러버렸다. 병원에서는 좀 늦었다고까지 했지만 그래도 친구 중 아직 하지 않은 친구들도 많은데 성형외과에선 호객행위를 이렇게 하는 건가 보다.

올봄에는 눈 위아래가 축 처져 바라볼 때마다 사진 속의 시아버지보다도 더 할아버지 같아진 모습이 너무 거슬려서 억지로 남편의 등을 떠밀어가며 상, 하안검 절개수술을 시켰다. 수술 후 한동안 피멍이 들어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원망하던 남편 모습이 평온을 찾아가게 되면서 나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흉한 모습으로 마주하고 뭘 먹기엔 너무하다 싶어 맞은편 남편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절대 안 했을 거라는 둥 아프다고 내게 투정만 했지, 나를 위한 배려가 아무것도 없었다. 간호사는 마취 주사를 놓고 하는데도 아프다고 난리 치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이고 참을성도 없고 엄살도 더 부리는 걸 보면서 어쩔 땐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다고 했다.

어쩌면 남자들은 정말 아파서가 아니라 술이나 담배로 평상이 약간의 마취상태로 익숙해져 있는 몸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자극에 못 견뎌서 고통스러워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뭐 이런 수술로 몸까지 젊어지는 건 아니지만, 아주 조금 젊어 보이게 한다든가 안 해도 되는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긴 하다.

눈가로 자주 가던 손수건을 찾지 않아도 된다거나 내려앉는 눈꺼풀의 무게를 덜 감당하게 되면 미간이 편안해져서 눈의 피로도가 개선되길 바랄 뿐이다. 내 경험으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눈꺼풀이란 얘기가 잠이 올 때뿐만은 아니었다는 거다. 아무튼 이번 수술에선 남편의 삼류 엄살이 가소롭게도 나를 웃겼다.

요즘은 접촉에서 접속으로 진행하는 시대가 되었다. 접촉도 쉽진 않지만, 접속이 더 어려운 내 나이가 자꾸만 무릎을 겸손하게 한다. 낮아지는 것은 무릎뿐이 아니고 손바닥도 시선도 고개도 말투까지 자꾸 아래쪽을 향한다. 나를 기준으로 불러야 했던 선생님, 사모님, 여사님, 같은 호칭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줄 알고 살았는데, 언제부턴지 식당이나 가게에 가서도 아줌마!’‘이모!’라고 부르지 않고 여사님!’하고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혹은 길 가다가 젊거나 늙은 낯선 사내와 마주쳐 말을 건네야 하는 상황에서도 저기요’ ‘아저씨가 아니라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편안한 나를 발견하면서 누구의 연출로 각색된 희곡의 시나리오를 연기하고 있는 건지 가끔 묻고 싶어지곤 한다.

내 삶의 무대에서 일류는 이미 언감생심이다. 남과 내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이류 연기자였으면 더 좋았겠다. 그러나 나라도 웃을 수 있는 삼류 연기자도 좋다. 연출과 연기를 스스로 최적화 할수 있는 내 삶이라서, 속된 말이 아니라 참된 말로 삼류라 해도 좋다. 속 없이도 행복을 위해 웃을수 있는 나의 삶이라서.

 

 



김숙   21-01-27 14:19
    
김인자 선생님 드디어 탑재하셨네요.
축하합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한 촛불이라도 켜는 것이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 보다 낫다."라는 말 다시 생각합니다.
용기 잃지마시고 재미있고, 좋은 글 많이 쓰시기를 기원합니다.
     
김인자인   21-02-06 17:00
    
쌤~
  감사합니다. ^^
어리버리는 항상 떨칠수가 없네요.
손잡아 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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