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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과의례    
글쓴이 : 나경호    24-10-05 11:33    조회 : 1,651
   3. 통과의례.hwp (125.5K) [0] DATE : 2024-10-06 16:12:44

통과의례

나경호

 

3 때의 일이다. 당시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2 학기가 시작되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실습 통보를 받았다. 그 시절, 실습은 취업으로 이어지는 게 관례였다. “OO 나일론이라는 회사에 대한 정보는 울산에 있다는 것뿐이었지만, 우리 과에서 가장 먼저 실습을 가게 됐다는 사실이 나는 더 기뻤다.

   울산은 가 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다. 그렇게 타향으로 이주하여 생애 처음으로 객지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일 년에 두어 차례 부모가 계신 고향에 갔다. 대학과 군대 가기 전 1 년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이 생활이 40 년 동안 이어졌다. 우연히 선택한 일이 평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우연은 필연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동기들과 함께 시작한 하숙집 생활이 겨울을 지나면서 나는 혼자가 되어 있었다. 부끄러운 사건이 발단이었다. 어느 날 퇴근 후 세면을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중 동기의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수건을 이용하여 발을 닦았다. 공교롭게도 그 광경을 동기가 보고 말았다. 동기는 어이없었던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나는 동기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새 수건을 사서 전해주면서 사과했다면 어땠을까? 그일 이후로 나는 동기를 피했다. 현명하지 못한 처신이었다. 얼마 후, 나는 스스로 하숙집을 나왔다. 부끄러움에 견디기 어려웠다. 더욱 괴로웠던 건 내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때문이었다. 동기 네 명 중 유일하게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으니 말이다.

  도덕적인 삶을 추구해왔던 나는 위선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 이러한 실체가 드러났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이 일은 40 년이 지나 종교적 신념을 포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동기들도 얼마 후 하숙집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나의 돌연한 이탈로 동기들 마저 하숙집을 떠나게 하고, 하숙집에는 경제적인 손실을 끼친 결과를 낳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다.

 

   나의 오점이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실습이 끝나고 새로운 부서에 배속을 받았다. 폐 나일론을 재생하는 팀이었다. 1 년이 다 돼 가던 어느 날 야간근무를 끝내려는 이른 아침이었다. 나일론 찌꺼기를 제거하는 작업을 위해 보일러의 스팀 밸브를 잠그는 조작을 하게 되었다. 조금 연다는 것이 마음이 안 놓여 좀 더 열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용해로 하부를 해체하던 작업반장이 화상을 입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1970 년대 당시 보일러실 작업 설명서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실수로 사람이 다쳤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반장님에 대한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중국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 이론이 있다. 나의 방향 전환이 나비효과를 단절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순간의 선택 혹은 실수가 먼 훗날 더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40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은 아린 추억으로 남아있다.

 

의논 상대 없이 혼자 결정을 내려야 했던 순간이든, 이기심이 만들어 낸 선택이든, 상황 판단이 미숙해서 발생한 사고이든 나의 청춘 시절은 수많은 오점으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그 오점들이 만들어 놓은 터 위에 뿌리를 내린 채, 나는 수많은 세월을 지내왔다. 세월이 나무에 나이테를 감기듯, 나의 삶에도 나이테가 새겨졌다. 위태롭기 짝이 없었던 청춘 시절, 그것은 내 인생에서 아프지만 피해 갈 수 없었던 통과의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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