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하나의 외로운 소리
4월 8일 루쉰의 ⸀내일」을 읽고 배웠습니다. 루쉰의 전집 『외침』에 수록된 작품들 하나씩 만날 때마다 제목이 왜 『외침』일까 생각해봅니다. 지금껏 읽은 루쉰 작품 속 인물들은 거의 가난하고 우매합니다.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은 교활하고 비열하지요. 약자와 방관자의 비루한 삶을 들여다보는 건 백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루쉰의 외침이 여전히 유효할까요.
⸀내일」은 지난 번 배운 ⸀약」에서처럼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여인의 절절한 모성애가 가슴 아프게 그려집니다. 아픈 아기는 어른들의 무지로 제때 치료받지도 못한 채 멀리 가버립니다. 아이가 떠나고 난 후 장례를 치르는 이웃사람들의 언행은 우릴 얼마나 씁쓸하게 하는지요. 꿈에서나마 아기가 방긋 웃으며 나타나길 애원하는 젊은 산씨댁에게 어느 누구도 진심어린 위로를 건네지 않습니다. 열이 나며 보채는 아이를 안고 새벽같이 달려간 한의원에서 만난 한의사의 성의 없는 진찰, 아이의 장례를 서두르듯 치루며 생색내는 왕씨 할멈 등 그저 자신들 이익에만 눈이 먼 비굴한 면면들입니다. 생명이 저만치 멀어져 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조차 아무렇지 않은 듯 그들은 방관할 뿐입니다. 허망하다 못해 화가 날 정도인데요.
재작년 남편을 먼저 보낸 산씨댁은 길쌈을 하면서 세 살된 아기와 단 둘이 살아갑니다. 그녀의 집과 벽 하나를 두고 셴형주점이 있습니다. 이전에 읽은 ⸀광인일기」 ⸀쿵이지」에서도 셴형주점이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술에 찌든 딸기코 라오궁과 파란돌이 아우 두 남자는 첫 장면부터 산씨댁을 노골적으로 희롱하려는 속내를 드러냅니다.
“산씨네 넷째 댁에서 소리가 난다면 물론 라오궁 패한테만 들릴 터였고 소리가 안 난다 해도 라오궁 패나 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린비 63~64쪽)
위 문장은 모두 잠든 한밤중 외진 마을에 유일하게 잠 못 드는 두 집, 센형주점과 산씨댁 집을 언급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아이가 아파 며칠간 물레질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술꾼들에게 염탐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 공간을 나누는 얇은 벽은 더 이상 의미가 사라진 듯합니다. 마치 그녀의 삶은 물레소리에 상관없이 주점에 고스란히 노출된 거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밤새 먹고 마시느라 떠들썩한 주점과 생계를 위해 밤늦도록 베를 짜야 하는 산씨댁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약을 처방 받아 돌아오는 길, 안고 있던 아이가 느닷없이 엄마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장면에서 엄마는 불안해합니다. 전에 없던 행동이라 혹시 모를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거죠. 아이는 약을 쓴 보람도 없이 이튿날 오후 갑자기 눈을 뜨고선 ‘엄마’하고 부른 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습니다. 한 생명이 스러져가는 순간 아이는 마지막으로 엄마라고 외칩니다. 그 외침이 아이가 떠나버린 적막한 빈집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허전하고 마음 둘 데 없는 산씨댁은 어서 잠들어 꿈결에서 아이와 만나길 고대합니다.
물레 소리가 들려올 땐 아이와 함께 한 나날이었지만 물레가 바닥에 내려놓인 후 아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습니다. 물레 소린 아이의 생명과 같지 않을까요. 그리스 신화에 운명의 세 여신 중 클로뜨는 생명의 실을 잣는 현재를 관장하며 아트로포스는 목숨이 다할 때 거두는 미래를 소관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생명을 할당해준 과거의 라케시스도 있습니다. 산씨댁 아인 이제 아트로포스 신에게 가버렸지요.
“오직 어두운 밤만이 내일의 약속을 품은 채 정적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몇 마리 개가 어둠의 대지에 숨어 컹컹 짖어 댈 뿐이었다.”
⸀내일」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아이 없이 홀로 남은 그녀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까요. 절망과 좌절로 얼룩진 삶으로 이어질지 다시 살아나갈 용기와 희망이 샘솟을지 우린 모릅니다. 다만 칠흑 같은 어둠속에 명멸하는 별빛을 쳐다보는 그녀가 그려질 뿐입니다. 아이의 외로운 마지막 소리, ‘엄마’를 잊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내길 루쉰도 바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