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의 딜레마
7월 1일 루쉰의 ⸀토끼와 고양이」 ⸀오리의 희극」 두 단편을 배웠습니다. 지금껏 만난 작품들과 달리 제목이 보여주듯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처럼 우화로 읽으면서 곳곳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는 재미도 솔솔 합니다. 작가 루쉰이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1922년 발표한 에세이 같은 글입니다. 두 작품 모두 표면적으론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지곤 합니다. 반면 역사적 맥락과 당시 시대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작품 전체가 알레고리적 비유로 이루어져 한층 깊이 있는 독서가 가능합니다.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은 1925년 『독일 비애극의 기원』이란 교수자격 청구 논문을 제출합니다. 그 논문 가운데 알레고리에 관한 의견이 있습니다.
“누구든, 무엇이든, 어떤 관계든, 임의의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알레고리는 세속의 모든 측면에 도사리고 있는 심연을 폭로할 수 있는 독특한 계시의 힘을 지닌 수사법이다.” (『발터 벤야민 평전』 글항아리 308면)
알레고리 서술 방식은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게 하며 유연하게 해석하도록 이끕니다.
⸀토끼와 고양이」에서 후원에 사는 셋째 댁이 애지중지하게 키우는 토끼에겐 그녀의 본성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선하고 여리다고 여기는 반면 검은 고양이가 토끼를 잡아먹었다고 지레짐작까지 하며 고양이한테 앙심을 품습니다. 선악에 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줍니다. 니체가 말한 노예도덕을 지닌 전형입니다. 강자를 악인으로 먼저 규정한 후 약자인 자신은 선하다고 간주하며 강자에게 원한 감정을 지닙니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숙할 수 없는 면면을 루쉰은 비판하고 싶었던 걸까요. 소설에 ‘쉰’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루쉰 자신도 맨 마지막 장면에 고양이를 죽일 의도가 비칩니다. 평소 고양이를 학대하는 걸 못마땅해 하는 어머니를 제외하면 셋째 댁처럼 쉰도 마찬가지로 노예도덕을 지닌 약자에 머무르고 맙니다.
이 단편에 어미토끼가 굴을 파서 새끼들을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굴은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은신처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언제든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굴」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보금자리인 굴에서 안식을 얻고자 하지만 환청처럼 들려오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어느 동물에 관한 이야깁니다. 집착과 불안에서 벗어날 길 막막한 인간 존재가 알레고리 기법으로 그려진 소설 같습니다.
⸀오리의 희극」은 러시아의 시각장애인 시인, 예로센코가 베이징에 등장합니다. 실제로 루쉰과 교류가 있었다고 하는데 시인이 내뱉은 “적막하다. 적막해, 사막에 있는 듯 적막하도다!” (그린비 185면) 이 한 줄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베이징이 누군가에겐 소란한 곳으로 기억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낯설고 고독한 공간으로 인식됩니다. 시인은 작은 연못에 올챙이를 키워 개구리 소릴 듣고 싶어 했으나 새끼 오리들이 올챙이를 먹어버렸다는 얘길 듣습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한 그는 결국 베이징을 떠나는데 오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잘 자라 ‘꽥꽥’ 울어대며 신나게 놉니다.
⸀오리의 희극」 제목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여전히 옛 것은 힘이 셉니다. 어지간해서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예전의 봉건 체제가 다시 돌아온 상황이 오리에 빗대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혁명은 한 두 사람의 희생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민초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루쉰의 절박한 외침이 토끼, 고양이, 오리, 개구리 등 동물 세계에 녹아든 두 단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