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망상의 굴레

6월 24일 루쉰의 ⸀흰 빛」을 읽고 배웠습니다. ⸀흰 빛」은 피해망상증을 앓고 있던 주인공의 일기로 이루어진 ⸀광인읽기」와 과거 시험에 실패한 후 몰락해가는 쿵이지의 삶을 다룬 ⸀쿵이지」와 비슷한 듯 다르게 펼쳐집니다. ⸀흰 빛」은 주인공 ‘천스청’이 대학 입학시험과 비슷한 현시에 열여섯 번 낙방한 다음 광기 상태로 집을 뛰쳐나가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는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소설입니다. 제목 ⸀흰 빛」이 지닌 여러 상징적인 의미부터 짚어봅니다.

첫째, 표면적으로 흰 빛은 달에 비친 빛을 말합니다. 루쉰은 그의 첫 소설 ⸀광인일기」 1과 2 일기에서도 달빛과 관련하여 떠오른 소회를 전합니다.

“오늘밤, 달빛이 참 좋다. 내가 달을 못 본 지도 벌써 30여 년, 오늘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고 보니 지난 30여 년이 온통 미몽(迷夢)속을 헤매었던 게다.”

“오늘은 전혀 달빛이 없다. 불길한 조짐이다.” (⸀광인일기」 그린비 30면)

달빛과 미몽에서 깨어난 순간을 연결해 묘사하는 ⸀광인일기」와 달리 ⸀흰 빛」에서 루쉰은 밝게 빛나는 흰 빛 이면에 스며든 어두운 그림자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173면)

둘째, 현시 합격자 방(搒)에서 자신의 이름이 없는 걸 발견한 천스청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야릇한 광채가 이후 전개될 비현실적인 환각과 환상의 흰 빛 이미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합니다. (171면)

셋째, 천스청의 집안 어딘가 숨겨져 있을 수수께끼 같은 은자(銀子, 은으로 된 돈)를 찾으려고 책상 아래 바닥을 쟁기로 파헤치는 광기어린 행동에도 흰 빛이 피어납니다. (175면)

넷째, 집에서 찾지 못한 은자가 산에 있을지 모른다는 환청을 듣고선 성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대목에 인상적인 글귀가 있습니다. “공포 어린 희망의 비명이 여명 속 서문 앞에서 아지랑이처럼 떨리고 있었다.” (177면)

‘공포 어린 희망의 비명’에도 흰 빛이 서려 있습니다. 흰 빛에 사로잡힌 천스청의 광기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주검으로 발견된 천스청의 열 손가락 밑에 낀 진흙은 다리가 부러져 손으로 주점까지 걸어온 쿵이지의 손에 묻은 흙과 겹쳐 보입니다. 쿵이지가 주변인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한 반면 천스청은 자신이 조롱과 멸시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괴감에 괴로워하다 발작 증세까지 일으킵니다. 둘 다 비극적 종말을 맞게 한 루쉰에게 희망은 절망의 다른 이름 같습니다. 희망이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며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거라고 말한 ⸀고향」의 마지막 장면이 스칩니다. (⸀고향」 그린비 104~105면) 희망이 이토록 허망한 건 혁명시대를 냉철하게 응시한 루쉰의 깊은 고뇌와 성찰에서 비롯되었을까요.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일방통행로』 길 출판사 119면) 라고 발터 벤야민은 말합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희망 없이 사랑하라는데 과연 가능할까요. 관심과 애정에서 출발한 건강한 관계에도 인간 본능에 가까운 욕망은 어디든 깃들어 있겠지요. 이성적 사유로 절제된 욕망은 지혜로운 삶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흰 빛」의 천스청처럼 오로지 부와 명예를 좇는데 급급한 욕망은 스스로를 파멸하고 맙니다.

문학 작품 가운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처럼 강렬한 제목도 없을 듯합니다. 미국 희곡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1947년 쓴 작품인데 흰 빛에 집착하는 천스청처럼 흰 정장과 흰 장갑으로 차려 입고 등장하는 블랑시의 첫 대사가 떠올라 옮겨봅니다.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민음사 12면)

지난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블랑시와 천스청,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 지 죽음이후에나 깨닫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