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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7강. 송의 흥망성쇠(평론반)    
글쓴이 : 김숙    23-06-14 01:32    조회 : 1,469

1: 27. 송의 흥망성쇠

 1. 중국에서 만나는 최치원의 명문

당 제국의 쇠망은 안사의 난(755~763)부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일대 난세 속의 변환기를 맞는다. 100여 년 후에는 소금 밀매업자 황소가 난(현대 중국에서는 黄巢农民起义라 호칭. 875~884)을 일으켰다. 이후 왕선지(王仙之,-878, 河南省濮阳市)가 합세하였으나 일찍 전사하였다. 이에 황소는 혼자서 수도 장안을 점령, 자신이 황제라 하며 국호를 대제大齊로 고쳐 대귀족과 관료들의 토지와 재산 몰수, 빈민 구제, 3품 이상 관료 전원 해직 등등 일대 혁신책을 폈다. 그러나 진압군에 의해 고전하다가 자결했다. 중국사는 황소의 난을 농민봉기사의 하나로 높이 평가한다.

신라의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崔致远, 857~908)은 추야우중 秋夜雨中이라는 5언절구, 쌍녀분전기雙女墳傳記라는 전기소설로 유명하다. 쌍녀분전기는 비문碑文 형식으로 쌍녀분기(墳记)7언 고시 쌍녀분(双女坟)을 포함하고 있다. 로맨틱한 명문은 최치원의 호방한 문학적 향취를 느낄 수 있고 명시로는 강남녀江南女가 유명하다.

특히 고운은 황소의 농민 봉기 때 토벌군 총사령관 종사관으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널리 그 글이 퍼져 희종 황제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렸다.

돌궐족 출신인 이극용(李克用, 856-908)은 한쪽 눈을 잃어 일명 독안룡独眼龙으로도 불리었다, 용맹하고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이 컸으나 한족인 당나라 귀족이나 평민을 학대하여 황실의 불만을 샀다. 주전충(朱全忠, 852912)이란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해서 주도권을 빼앗긴 이극용은 당 황실의 재건을 시도하다가 울화통으로 죽어버렸다. 이후 제국의 영토는 다시 일대 혼란의 시대를 맞아 지역마다 새로운 나라들이 생겨나면서 510五代十國시대(907~979)를 맞았다. 이런 명칭은 황하 유역과 화북 일대를 지배했던 5개의 왕조(오대)와 화중, 화남, 화북 일대에서 명멸했던 지방정권(십국)에서 생긴 것이다. 이때 왕들은 그 전 시대와는 달리 온갖 중하류층에서도 부각됐다.

2. 송 제국의 건국자 조광윤

당나라가 망한 후 30~70년의 혼란기는 송나라가 10국을 통일한 979년까지 지속되었다. 조광윤(趙匡胤, 宋 太祖. 927-976. 재위 960-976)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며 제국(960~1279)이 탄생했다.

조광윤의 본향은 하북성 탁군涿郡 보새현保塞縣으로 삼국시대 촉한의 유비와 동향. 조광윤곽위가 후한을 무너뜨리고 후주後周를 세우자 그 개국공신으로 일약 출세했다. 후일 숙영 중 참모들이 공모하여 그를 만취케 만들어 황포를 입혀 황제로 추대했다(黄袍加身)는 후일담이 있는데, 이 사건을 진교병변(陈桥兵变又称陈桥驿兵变)이라고 한다.

이로써 960년 조광윤은 송 태조가 되어 카이펑을 수도로 삼았다. 역대 왕조들은 대개 토사구팽의 철칙을 채택했지만, 그는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유명한 배주석병권(杯酒释兵权, 961.7)을 실현했다. 이는 중앙집권제의 실현이라는 긍정적인 요소와 함께 지역 실권자의 부패 온상을 제공해 준 점과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한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처럼 치밀했던 그였으나 원인 불명의 죽임을 당했고 왕은 동생 조광의가 되었다. 이후 조광의의 자식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버렸다. 야사에는 금궤지맹(金櫃之盟)이란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조광윤이 철저한 정치를 폈음에도 실패햇다. 기본 틀이 잘못되면 그 왕실은 절대 오래 가지 못하는 실례이다.

3. 왕안석과 충신 악비

어느 왕조나 마찬가지로 송나라에도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란 탁월한 개혁가가 북송시기에 등장했다. 1만자로 이뤄진 일명 <만언서(萬言書)>라는 개혁서를 황제에게 올렸다. 개혁은 반드시 기득권의 막강한 세력 앞에서 좌절당한다. 이 개혁안도 뭉개지다가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의 강력한 지지로 겨우 강행하게 되었다.

왕안석의 신법 개혁에 맞섰던 유명 인물에는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을 비롯하여 당대의 최고 문인들인 구양수(歐陽修, 1007-1072), 소식(蘇軾, 東坡, 1036-1101) 등등이 줄을 이었다. 개혁추진 2 인자였던 여혜경(吕惠卿, 1032-1111)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배신, 구법파로 전향하여 신법파를 공격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왕안석은 사직했으나 왕 신종이 그 기본 틀을 유지하다가 1085년 왕이 죽자, 10세의 철종(哲宗, 재위 1085-1100)이 즉위, 그의 할머니가 나서서 개혁 반대의 영수 사마광을 기용하면서 개혁의 공든 탑은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고 개혁은 좌절되었다.

진보적인 철학사상가이자 유명한 문인이기도 했던 왕안석은 세상의 도란 하늘로 만물은 여기서 스스로 생긴다(道者天也, 萬物之所自生)”라며, “만물을 생성하는 것은 기이다(生物者, 氣也)”라고 주장한 유물론자였다.

북송을 대표하는 개혁가였던 왕안석의 좌절은 곧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어 이민족에 쫓겨 정부가 남하, 간신히 (臨安, 현 항저우)에 도읍을 둔 남송(南宋, 1127-1279) 왕조가 섰으나 이미 잃어버린 땅을 회복할 기력을 되살릴 수는 없어 전전긍긍했다.

또한 현대 중국사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악비(岳飞, 11031142)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서법가에 시인으로 숭앙받고 있는데 화평론자로 반민족 배신자였던 진회의 간교한 술책에 휘말려 투옥, 살해당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진회(秦桧, 1090-1155)는 재상으로 적국과 내통, 국토를 내주는 조건으로 화해하고도 이를 숨기는 등 온갖 간교한 술책을 다 부렸으나 죽은 뒤 그의 죄상과 악비의 억울함이 드러나 민족반역자로 악명을 남겼다.

런 충신을 죽인 나라가 성할 리 없다. 징기스칸과 그 후예들에 의하여 남송은 궁지에 몰려 대륙의 남단인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까지 도주, 소략한 조정을 꾸렸다. 황실의 체통은 지켰다고 전하지만 그들의 최후는 비참했다.


2: 신작합평 신선숙/ 문영일/ 민경숙/ 유양희


김숙   23-06-14 01:43
    
강의 줄거리 형식으로 후기를 작성해 보앗습니다. 부족하거나 토론이 필요한 부분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정주   23-06-20 06:12
    
부족한게 한군데도 없습니당
수고 많으셨어요!
오정주   23-06-20 06:12
    
안사의 난,최치원의 토황소격문,송의 태조 조광윤,
    탁월한개혁가 왕안석 그에 맞섰던 사마광,
당대 최고뭄인 구양수와 소식 그리고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혜경....

김숙샘의 일목요연한 스토리텔링으로 역사 속으로 쉽게
빠져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용. 아우 다들 여행가셨나봐요.
저도 어딜 다녀왔슴다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