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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의 생애와 문학    
글쓴이 : 정진희    23-04-09 17:37    조회 : 933

박경리(朴景利, 1926.10.28 - 2008.5.5)의 생애와 문학

 

출생과 성장

작가 박경리는 19261028(음력)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 328-1번지 (현 통영시 문화동 아래 간창골)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생가는 그녀가 36세 때 발표한 소설 <김약국의 딸들> 무대로 잘 알려진 통영의 서문 고갯마루(통영 말로 서문 까꾸막)입구의 좌측 골목 안쪽에 있는 막다른 집으로 외양은 조금 달라졌어도 그대로 남아있다.

박금이(朴今伊, 박경리의 본이름)의 친부 박수영(朴壽永)14세 때 네 살 위인 거제도 태생의 김용수와 혼인했다. 박수영은 18세 되던 해 첫 딸 금이를 낳은 22세의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웃 젊은 여자 기봉이네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 버린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작가가 된 박경리는 언젠가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는데, 적삼 하나만 갈아입어도 골목이 환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젊은 어머니의 운명을 가슴아파하면서도 버림받은 어머니에 대한 경멸과 분노를 지울 수 없었던 것 같다.

학창시절의 그녀는 역사과목을 무척 좋아했고,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공부보다 책 읽기를 좋아해 수업시간에도 노상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읽었다고 한다. 하루 3권씩 소설책을 빌려 밤새도록 다 읽고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등교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책벌레이다 보니 친구를 널리 사귀지 못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평탄치 못한 소녀시절의 고뇌와 버릇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운명적 자기방어를 체질화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2. 문학의 길

소설가 김동리 선생 집에 셋방을 살던 여고시절 친구의 주선으로 두세 편의 습작 시를 들고 이 대가를 찾아간다. 이 때 김동리는 그녀에게 시보다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한다. 얼마 후 그녀가 들고 간 단편소설 <불안지대><계산>이라는 제목으로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1955(29) 8<현대문학>에 실린다. 이때까지의 그녀의 이름은 박금이었으나 김동리가 묻지도 않고 박경리(朴景利)로 개명을 해버린 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듬해 8월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김동리 2회 추천으로 실리자 본격적으로 등단이 이루어졌고, 1957(31)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녀가 그토록 염원했던 문학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려웠던 시절 박경리에게서 대작가의 싹을 본 김동리의 혜안이 감탄스럽다.

그녀가 대하소설 <토지>를 문학지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69(43) 9월부터였다. 이후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4만 여장이 넘는 대하소설이 완성된 것은 26년 만인 1994(68)이었다. 박경리라는 작가를 이제 <토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개인에게나 한국문학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대하소설은 등장인물만도 600명이 넘는다. 시간적으로도 18971945년에 걸친 거의 반세기를 아우르는 대장정이다. 동학혁명, 일제 침략, 국권침탈, 독립운동과 광복에 이르는 시대적 격동이 총망라된 역사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왜 제목이 <토지>냐는 질문에 작가는 지극히 원초적 답변을 들려주곤 했다. 토지는 원래 자연 그 자체였지만 사람들이 이리저리 금을 그어 소유권을 나누어 가지면서 온갖 권력과 부의 소용돌이가 되고 말았으니 토지야 말로 인간사를 속박해온 원죄가 있지 않냐고.

장장 5부로 구성된 <토지(土地)>는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각계 각층의 인간들이 맞닥뜨린 운명적 부침을 드라마틱하게 담아낸 대작이다.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국내에서 많은 화제와 인기를 불러일으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한 박경리는 이 작품 이후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영예의 뒤에서 그녀는 숱한 역경을 감내해 내야 했다. 1969년 가을부터 토지 1부를 집필하던 박경리는 1971(45) 9, 돌연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15시간의 대수술을 치르고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 원고를 쓰며 병마를 다스린 그녀는 사위 김지하 시인의 투옥으로 또 한 번 아픔을 겪는다. 사위에게 차입할 옷 보따리를 들고 서대문 교도소를 오가던 박경리가 사람들 눈에 띠곤 했다.

<토지>3부를 마친 후 1980(54)부터는 사위의 고향인 강원도 원주로 거처를 옮기고 흙과 더불어 마지막 삶을 가꾸어갔다.

 

3. <토지> 이후, 죽음

<토지> 완간 이후의 그녀는 소설 창작보다 토지문화관 건립과 환경에 관심을 쏟으며 신문기고와 산문, 시 쓰기에 골몰했다.

작가는 매지리 토지문화관 사택에 칩거하면서 밭농사와 독서, 집필에 파묻혀 만년을 지냈다. SBS에서 받은 드라마 <토지> 원작료 2억원으로 토지문화관 옆에 창작실 다섯 개가 딸린 별관을 짓고 작가가들이 토지문화관 창작실과 별관에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살폈다.

생전에 줄담배를 즐기던 박경리는 20084월 초, 폐암으로 입원한 후 연명치료를 거부한 채 한 달 후인 55, 82세로 눈을 감았다. 그치지 않는 열정으로 자연을 사랑하던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통영 땅에 묻히는 것이었다. 59일의 장례식에는 작가가 졸업했던 통영초등학교 학생들이 도열한 가운데 통영시 산양면 미륵산 기슭의 토지 문학관으로 향하는 장례행렬을 시민들은 따듯한 시선으로 지켜주었다. 당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소박한 묘지와 문학관, 이제 국내 문학기행 1번지가 된 통영은 그녀의 고향이자 영원한 우리문학의 모향으로 남게 되었다. 정부는 그녀가 타계한 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리의 생애와 그의 작품 << 시장과 전장>>을 읽었습니다.

'토지'라는 작품에 가려져 정작 작가의 생애에 무관심했다가 이번에 그의 생애 비하인드를 

꼼꼼히 정리해 주신 고경숙선생님 덕분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의 재혼과 통영을 등진 사연에서는 한 여인의 씻을 수 없는 한이 느껴졌습니다.

위대한 인물 하나가 탄생하기 위해 이처럼 큰 고난이 있었다니요..

박경리표 소설의 재미와 징한 생애를 살펴본 시간이었습니다.

처음 강의에 합류하신 박상주 회장님 반갑습니다.

5월에 <<조이럭 클럽>>으로 뵙겠습니다.



박진희   23-04-09 20:22
    
보석같은 정보가 가득한 후기를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박경리의 삶과 문학, 김동리와 인연, 통영과 문학관... 감동으로 찾아와 바닷소리를 들으며 작가 곁에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봉혜선   23-04-10 07:34
    
꼼꼼한 정리에 수업을 다시 들은 듯 합니다. 피드백 확실한 후기 고맙습니다.  열 가지 일하시며 열 가지 백 가지 넘는 고민과 생각과 실행으로 앞장 서 주시니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윤오영 문학상 수상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당연하고 오히려 뒤늦은 감이 듭니다. 더 승승장구하시고, 늘 바라기는 자꾸 건강해지세요.
전효택   23-04-10 09:34
    
오랫만에 박경리 작품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대하소설 <토지>로 워낙 유명한 작가여서 이 분의 문학 인생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고,  작가의 성장 배경과 가족 환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시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후보라고 생각합니다. 원주의 박경리 문학관과 문학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작가의 남다른 창작열과 문학인으로서의 모범적 자세와 사회에의 기여를  배워야겠다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