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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서정시인 이백의 매력 - (평론반)    
글쓴이 : 곽미옥    23-04-11 22:58    조회 : 1,017

 강풍에 비까지 어수선했던 하루였어요. 반가운 선생님들 뵈오니 날씨쯤이야 ~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낙지 춤 연습해야겠어요. 온몸에 힘을 빼고 흐늘흐늘하게 최소 2분 동안이라도 추어보라고 하셨어요.  체조와 단전호흡하시고 2시간 꼬박 운동을 하신다는 건강 비결도 알려주셨지요. 

제1부. 이백의 매력

* 李白, 자 태백(太白, Lǐ Bái, 701.2.28-762.12).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술꾼에 시만 잘 썼던거 아니고 검술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했다.

시선(詩仙,Poet Transcendent),

주선(酒仙,Wine Immortal),

시협(詩俠, Poet Knight-Errant).

적선인(謫仙人, Banished Transcendent)이란 별칭. 1,100여 편의 작품.

* 당나라 국호 환원 - 705년(4세), 장간지(張柬之, 625-706. 시인, 재상)가 쿠데타로 무측천 실각시키고 중종(中宗)을 왕위에 복귀, 당나라 국호 복원.

* 712(11세), 두보 출생. 현종(玄宗, 685-762) 즉위. - 나이 뛰어 넘어 막역한 사이, 중국의 양대 산맥 이백과 두보.

* 쇠 갈아 바늘 만들기 - 미주 상이산(象耳山, 四川省眉山市境内, 海拔1236米)에서 수학 중 싫증나 하산, 청련향에서 무(武)노인의 철을 가는 절구공이 마철저(磨鐵杵) 보고 대화. 여기서 마저성침(磨杵成針), 철저마성침(鐵杵磨成針)이란 말 유래.

* 도교적 단련 - 718(17세), 대광산(大匡山, 四川江油市大康镇西北)에서 열공. 그 목표는 공성신퇴(功成身退). 이 말은 <노자>의 “功成 名遂(마침내 수) 身退 天道.” 그는 노자의 “知止不殆” 등 익힘.

* 풍골 창작법 - 720年(19세), 出游成都. 소정(蘇頲, 당시 최고 문장가)이 익주(益州, 주도가 成都) 자사(刺史)로 부임해 그를 만나려고 성도 행. 소정은 이백을 높이 평가, 촉 인재로 조정에 천거. 풍골(風骨) 완성 못했으나 앞으로 사마상여에 비견. 풍은 사상, 골은 표현법.

* 사마승정에게 사사 - 725年(24세), 사마승정(司马承祯, 647-735), 숭산(嵩山) 입산, 반사정(潘師正)에게 도교 방술법(方術法) 습득. 톈타이산(天台山) 은거. 측천무후-현종시기 궁정 초치 자주 받음.

* 여산 첫 등정 - 726(25세), 여산(庐山), 金陵(即今江苏省南京市). 扬州 등지 유람. 여산(廬山, Lushan National Park). 강서성(江西城) 구강시(九江市) 서남쪽.

* 이백의 시 <望庐山瀑布>의 “日照香炉生紫烟, 遥看瀑布挂前川. 飞流直下三千尺, 疑是银河落九天”이 유명. 이밖에도 미려산장(美廬山莊), 펄벅 별장(賽珍珠故居) 등.

* 첫 결혼 - 727(26세), 당 고조 이연의 어렸을 때 친구로 개국공신인 허소(许绍)의 막내. 허어사의 셋째 아들(許自正)의 딸(许紫烟, 一名许萱)이 이백의 첫 부인인데, 당시 허씨 집안은 몰락 상태.

* 황학루 - 728(27세), 맹호연(孟浩然)과 함께 황학루(黃鶴樓) 유람. 맹호연은 고양 양양(襄陽) 녹문산(鹿門山) 은거 중 40세에 낙양 과거 응시. 이백은 시<贈맹호연>“달 아래 술을 마시면 자주 취하고(醉月頻中聖), 꽃에 묻히어 임금 모시질 못 했네(迷花不事君)”이라며 술꾼 과시. 청주를 성인, 탁주를 현인.

* 원단구(元丹丘)와의 관계 - 730(29세), 백조산(白兆山) 도화암(桃花巖)에서 글공부 하다가 长安으로 가 몇몇 왕족과 고관들을 만났으나 별 성과가 없어. 떠돌다가 가을에 평소 숭앙하던 도가의 대가 원단구(元丹丘, 丹丘生,丹丘子, 烟子元丹)를 만남.

* 산동으로 이사 - 736年(35세), 가족 이끌고 동로(東魯, 현 山東 연주(兗州))로 가다. 그리 간 이유는 검술 배우려고 했다는 설, 친척들이 그를 백안시했다는 설, 셋째는 이미 그의 일가들이 산동에 살고 있었다는 설.

* 재혼과 이별 - 741(40세), 부인 허씨(許氏) 작고. 742(41세), 유씨(劉氏)와 동거, 곧 결별. 부인 비판한 시 <설참시증우(雪讒詩贈友)> 등. “저 부인의 음탕함은 / 메추라기 나는 것만 못하네.” 본처 후 정식 아내를 얻은 건 744년 당 고종 때 재상을 지낸 종초객(宗楚客)의 손녀 종씨부인.

* 한림원 한림학사 - 743(42세), 현종 부름으로 翰林院의 한림학사 되다.

당시 황실에는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 내각 문서 기초),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 황제 조서 등 중요문건 담당). 이백은 후자에 임명, 현종은 국정 참여보다는 황제의 여흥이나 시 창작에 동원.

* 두보와 여행 - 745(44세), 두보가 찾아와 둘 함께 여행, 이후 둘 다시 못 만남. 이백의 시에 나타난 교유인은 4백여 명. 두보 소재 시는 4수이나 가장 진한 신뢰. 이백은 계속 보국안민의 꿈을 품었지만 냉대와 극빈 속에서 유랑 생활.

* 원단구와 은거 - 751(50), 오랜만에 귀가 했으나 석문산(石門山)에 은거하던 원단구(元丹丘) 찾아가 은거. 마음은 어지러운 세상 근심.

정치서정시 <증하칠판관창호(贈何七判官昌浩)> 등 많은 작품이 현실의식을 강하게 나타냄.

* 계속 정치서정시 창작 -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지방 관료들을 통해 정치참여의 기회를 노렸으나 거듭 실의와 좌절 속에서 쓴 악부시 <원별리(远别离, 遠別離)>는 매우 유명한 정치서정시다.

* 안사의 난 - 752(51세), 이백은 안사의 난 근거지였던 유주(幽州, 옛 명칭으로 북방 경비 요충지. 今北京市城区西南广安门附近)로 여행, 군사훈련 목도. 755(54세), 안사의 난(安史之乱, 755.12.16-763.2.17)이 범양(范阳, 唐朝改幽州为范阳郡)에서 발발. 한 달 만에 낙양 점령.

* 안록산 - (安禄山, 703-757.1.29)은 이란계 무장 아버지와 터키족 돌궐(突厥)의 무녀(巫女) 어머니 사이에 랴오닝성에서 출생. 안(安)은 계부의 성. 6개국어 구사로 무역 중개인 거쳐 무관.

* 마외역 병변(马嵬驿(驛)兵变) - 756년7월15일, 태자 이형(李亨)이 숙종(肅宗)으로 즉위, 촉으로 피난한 현종은 추인. 태자 이형(李亨)은 황하 유역 담당, 왕자 이린(李璘, 永王, 현종의 16째 아들로 숙종의 이복동생)은 양자강 유역 방어 담당, 계속 반란군과 대치, 토벌전 전개하도록 현종이 지시.

* 양귀비의 최후 - 756(55세), 6월, 현종, 장안 떠나 피신 중 마외파(馬嵬坡)에서 양국충(楊國忠) 피살, 양귀비 목매어 죽다.

* 실의와 낙담 - 이백, 귀향길에 올라 팽택(彭澤, 현 江西省九江市彭泽县)에 이르렀을 때 체포당해 심양(寻阳, 尋陽) 감옥에 반 년 정도 투옥. 옥중 시 <상최상백우장(上崔相百忧章)>에서 최상(崔相, 崔涣. 재상 지낸 고관으로 현종과 숙종 측근)에게 자신의 무고함과 울분을 고하는 내용으로 “술잔 들고 큰 한숨 쉬니, 잔에 피눈물이 가득하네(举酒太息, 泣血盈杯)”

* 61세에 타계 - 762(61세), 早春, 卧病当涂(當塗, 당도. 安徽省马鞍山市当涂县). 최후 여행길 다녀온 후 11월 10일 오시(午时) 당도에서 타계.

* <임로가> - 죽음 앞에서 지은 임로가(臨路歌)>(제목이 <临终歌>의 오류일 가능성 제기).

大鹏飞兮振八裔, 中天摧兮力不济.(대붕비혜진팔예, 중천최혜역부제), 대붕이 날아 천하를 떨치고, 힘에 겨워 중천에 꺾였네... (중략)

제2부. 합평

김대원/문영일/이영옥/민경숙/곽미옥 (존칭생략)

다음시간에는 <두보의 성장과 유랑>을 강의하십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셔요~^^


오정주   23-04-12 10:44
    
1100여편의 시가 님아있다는 이백, 주로 낭만적인 시라서 좋아요.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사용이 명쾌했다는 평을 받는  청련거사!
정치참여는 실패했지만    두보가 찾아와 함께 여행했을 때가 가장 좋았을것 같아요.
 곽총무님 덕분에 다시 복습했습니다. 감사함다!
     
곽미옥   23-04-13 21:52
    
바쁜 반장님이 후기방에 먼저 오셨네요. 여러모고 수고가 많으셔요~
  성당기 문학에 이백과 두보가  최고의 시선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당의 문학을 발전시켰지요.
  낭만주의의 대가 이백의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고 있지요.
  저도 강의를 들으며 중국문학을 공부할 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감동의 시간이었어요.
박진희   23-04-12 20:20
    
'풍골(風骨) 창작법'이란 사상이나 idea로 뼈대를 갖추는 표현법이란 걸 배웠어요.
19세엔 그 창작법이 부족했는지 몰라도 세파를 겪으며 정치사상과 서정적 표현은 차고 넘치는 불후의 시인이 되었죠.
 또한 노자의 '그만 둘 때를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知止不殆)'란 교훈을 갖고 살았다는 그의 인성에 놀랍니다.
미옥샘 후기로 이백과 그의 시대를 공부 잘했어요. 수고하셨어요!
     
곽미옥   23-04-13 21:58
    
진희샘~ 반가워요~ 중국 한시를 대표하는 정치서정시인 이백과 두보는 난세에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은 대단하지
    요. 누가 더 위대한지를 따지는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 노나라 술이든 제나라 술이든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두보에 대한 그리움만 강물처럼 흐른다" 는 
    이백의 절절한 마음이 너무 멋지지요?
신현순   23-04-13 12:53
    
미옥샘~ 마음이 많이 바쁠텐데 후기 쓰느라 수고하셨어요.
'이백'하면 술과 시가 먼저 떠 오르는데 검술에도 능하다니 문무를 동시에 갖춰 매력이 넘친다니 더 관심이 가네요.
풍골 창작법으로 글을 쓰고  노자의 '그만 둘 때를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를 품고 산 이백의 사상도 명문의 대가 답게 남다르군요.
우리도 남다른 데를 함 찾아 나서 볼까요? 하 하
미옥샘 덕분에 다시한번 복습합니다. 수고하셨어요~^^*
     
곽미옥   23-04-13 22:01
    
현순샘~ 우리는 멀리서 찾지않아도 될듯요.  평론반 선생님들 모두 남다른데가 있으시니~~
    나이를  초월한  이백과 두보의 우정이 부러울뿐이네요.
    다음시간에 두보의 문학을 강의하신다니 기대 만땅이네요~~
김숙   23-04-14 01:39
    
총무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 때 태백을 생각하면 주태백 이미지 때문에 망설였습니다. 이제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술꾼에 시만 잘 썼던 거 아니고 검술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했다." 이런 분을 다시 만나게 되는 수업이었습니다.
다시 복습할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