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 8.15~1821 5.5.)는 the Republic of Genoa(이탈리아) 지배하에 있다가 1755년부터 독립을 유지 중, 1769년 프랑스가 점령한 직후의 코르시카섬의 아작시오(Ajaccio, Corsica)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이며 정치인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13남매 중 8남매만 성장했는데 그 중 둘째.
오튕 종교학교를 거쳐 브리엔느 군사학교와 파리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포병장교로 임관.
프랑스혁명(1789.7.14.)의 혼란 중 휴가로 귀향하여 코르시카 섬에서 사료를 수집하며 독립을 꿈꾸다가 국민회의가 프랑스인과 코르시카인의 동등권을 인정하자 귀대, 혁명세력에 가담(1792년).
1793년 말 영국군 집결지인 툴롱(Toulon)을 탈환(1793)하는 공로로 24세에 장성으로 벼락 승진
1794년 혁명주동자인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당하고 나폴레옹은 투옥.
석방 후 혼란을 틈타 왕당파 득세, 나폴레옹이 대포로 진압하고 사령관급으로 승진.
1796년 귀족의 미망인으로 바라스의 애인이기도 한 조세핀(Josephine)과 결혼.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발탁, 이때 그의 나이 27세. ( 이탈리아 원정을 20년간 계속되는 나폴레옹 전쟁의 서막으로 보기도 함)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이탈리아에 주둔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눈보리 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려 함
몇 달에 걸쳐 산맥을 돌아서 넘어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 줌.
이러한 군사적인 업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제 성냥을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혁명 정부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 이집트로 파병 명령,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끔.
이집트 원정에서 귀국한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18일 쿠테타(1799 11.9~10 안개의 달)’를 일으켜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침.
*필독서: 칼 마르크스 著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의 18일>>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음.
나폴레옹의 제 1 집정 이후는 침략의 역사
1802년 종신집정
1804년 노트르담 성당에서 교황 피우스 7세(Pope Piusus VII)에 의해 정치 철학 부재인 상태에서 황제 대관식
1805년 트라팔가 해전(Battle of Trafalgar), 아우스테르리츠(Austerlitz) 전투
1806 대륙 봉쇄령, 프러시아(1806)와 스페인 침략(1808), 오스트리아 점령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조세핀과 이혼(1809), 황녀 마리 루이즈(Marie Louise )와 재혼(1810)
1809년 아스페론-에슬링 전투 참패,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1813년 라이프찌히 패전으로 인기 급락, 엘바섬 유형(1814년), 탈출(1815년) 파리 입성으로 100일 천하.
워털루전(Battle of Waterloo)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과 프러시아의 블리허 장군에게 패배 (1815) 미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남자로서 도망자라는 오명을 쓰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거절.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 이 절해고도에서 6년 동안 회고록 구술로 일그러진 자신의 이미지 쇄신하려 함.
“나의 목표는 단 하나다. 모두 다시 합치고 모두 화해시키고 모든 증오를 잊고 모두를 하나로 모으 고 여러 이질적인 요인들을 통합하여 새로이 하나의 프랑스와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민법전(나폴레옹 법전)>을 말살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민법전>은 나의 행정재판 절차를 글로 옮긴 것이며 장관들과의 서신을 수집한 것이다. 행정가로서, 또한 광대한 ‘프랑스 가족’을 재조직한 자로서 행한 그 모든 일들이 … ”
1821년 영국에 의해 독살 당함.
영국의 호의로 그의 유해는 1840년 파리 부상병원의 현재 묘지로 이장 됐는데 그때까지 시체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함.
2차 대전 후 머리칼 검사에서 비소 검출, 독살설이 확인됨.
(그에 대한 연구나 평전, 에세이가 60만 종이 넘는다고 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교활하고 부정적이다. 그 예로,
집권 후 저항 자코뱅파의 비판과 재기를 억누르고자 왕당파 사면, 사회 질서를 잡는데 성직자를 이용함. “그리스도의 강림이란 기적은 인정하지 않으나 사회질서라는 기적은 인정한다.”
교황과도 일정한 협상점, 권력유지의 방패막이로 사용하며, 성당에서는 “주여, 집정(황제)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라고 기도 하도록 하는 두 얼굴을 보임.
또한 농민들에게 토지 소유의 입법화와 군수품인 식량과 의복의 조달로 농촌경기를 호황으로 만든 인기를 바탕삼아, 그 농민들을 군의 기본으로 삼아 세계정복의 사명감으로 '영웅의식'을 고취함.
여기에다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로 폭군 지배의 나라들을 침략했기에 '해방군'일 수도 있었다.
스탕달이 본 나폴레옹
문학사에서 나폴레옹을 제일 존경한 작가가 Stendhal, Marie-Henri Beyle(1783-1842)이다.
<<파름의 수도원(The Charterhouse of Parma, La Chartreuse de Parme)>>(1839)의 무대는 이탈리아의 Parma, 1796년 나폴레옹의 밀라노 입성으로 소설이 시작 된다. “시민들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행복과 감격’으로 맞았다”, 13개월 간 프랑스군이 퇴진했을 때를 “반동과 구사상으로의 복귀 풍조”라고 표현.
나폴레옹은 유럽의 해방자로, 프랑스 청년을 위해서 하느님이 파견한 인물로 묘사됨.
스탕달은 <나폴레옹전>이나 <나폴레옹의 생애에 관한 각서>등에서 "나폴레옹 역사의 첫 구절을 씀에 있어 나는 어떤 종교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파트릭 랑보의 <<전투>>
Patrick Rambaud(1946 4.21~ ) 파리 출생. 역사소설, 패러디, 희곡, 시나리오 등 30여 권 집필.
<<전투>>로 1997년 공쿠르상(Prix Goncourt)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Grand Prix du Roman de l'Academie Francaise)을 수상함.
<<전투>>는 1809년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아스페른-에슬링전투(Battle of Aspern-Essling)가 소재가 된 장편으로 이틀 간 일어난 일을 그림.
작가의 나폴레옹에 대한 인상은 부정적인 듯하다.
“나폴레옹은 살이 붙기 시작했다. 그의 캐시미어 조끼는 이미 두두록해진 배를 조이고 있었다. 목은 더 이상 없는 듯 하고 어깨도 거의 비슷한 형상이다. 풀린 그의 시선은 화를 낼 때만 불길로 일렁인다. 오늘 그의 뚱한 모습이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다.”(18쪽)
“적군은 비엔나의 주민들을 선동하려고 아침마다 찬가를 불러대곤 햇다.”(20쪽)
문화의식의 부재, 점령군의 횡포 예로, 바이올린까지 캠프파이어로, 술, 가축등을 맘대로 잡아먹기, 명화 의상 등 훼손(24쪽)
<<전쟁과 평화>>의 나폴레옹
1812년 나폴레옹의 모스코바 원정이 배경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왕위 찬탈자’란 이유만으로도 그를 적대하기에 충분”하며,
사생아이며 혁명파인 ‘피에르’로 상징되는 인물들은, “국민이 그에게 실권을 준 것은 그에 의해 부르봉 왕조에게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며
“혁명은 정말 위대한 사업이라는 입장,
보로지노 전투에서의 침략의 잔혹상을 목격한 후 생각을 바꿈.
보로지노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콧물감기를 앓지 않았던들 한층 더 탁월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고, 그 결과 러시아는 오래 전에 멸망해서 세계지도도 바뀌었을 것”에 대해,
톨스토이는, “어떠한 영웅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결론으로 유도해 감.
나폴레옹의 전법
1. 집중화
2. 군제 편성의 유연성
3. 프랑스 군의 정례화와 질적 향상
4. 보급의 현지화
5. 도보 속도를 1분간 120보, 다른 군대는 당시 70보
*황제의 자기 중심적 사고가 문제점
다음 시간에는 전쟁 문학론 (2)로 “세계 제 1차 대전”이 이어집니다.
<<수필반 풍경>>
강추위 끝이라 그런지 보이지 않는 얼굴이 더러 있었는데 그 서운함을 김교희 샘이 직접 만들어 온 “예쁜 약식”이 달래주네요. 우리 분당반 글 풍년이 났습니다. 총 아홉 편의 글을 합평했습니다. 여느 때 보다 상세한 교수님의 말씀을 간단하게나마 옮겨 봅니다.
<머리 속의 지우개> 김데보라
작가는 내용의 일체감, 쉬운 단어 선택과 문장에 역점을 두어 썼다고 합니다. 퇴고에도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네요.
교수님께서는 작가를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도 알 수 있게끔 상황을 풀어서 썼으면 좋겠고,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좋은 글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탱이, 영감탱이> 김교희
교희님의 첫 글입니다. “미모만큼 글도 미모” 이 한 말씀으로 끝내 주는 게 아닐까요?
문제점으로 상황설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죽음 묵상> 류문수
도입부를 좀 간략하게 하고 제목만 고치면 아주 좋은 글이라며 OK!
<안단테> 김계원
오랜만에 나온 글인데, fact가 살아 있는 좋은 글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도입부분 조금 정리하면 더 좋겠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불곡산이 맺어 준 우정> 정길순
많이 애 쓴 흔적은 보이는데, 인용부분은 출처를 명확히 하고, 책임 질 수 있는 부분만 인용하라는 말씀과 ‘불곡산’ 등산의 과정을 그려낼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유배지에서 세 미녀와 1박2일> 이우종
다시 쓴 글, ‘군소리’가 줄고 깔끔해 졌지만 주제에 어긋난 부분은 과감히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정말 평화롭게 갔을까> 박재연
결석을 한 관계로 다음 시간에 합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움> 김기근
서두 부분의 설명이 미흡하단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력이 대단하다고 감탄도 하시네요. 뒷부분은 흠잡을 데 없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조혈모 세포 이식>, <낙서장> 차재기
남편의 투병 중 걱정해주는 감사한 분들에게 투병과정을 알리기 위해 페이스북에 쓴 내용이라는 작가의 변에, 수필이라는 형식에 억매이지 말고 일단은 자유롭게 쓰고 내용상 <낙서장> 부분이 먼저이니 <넋두리>로 제목을 고쳐서 <넋두리>1,2,3... 이렇게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전체적으로 도입부에 대한 지적이 많았네요. 다음 시간에는 총 5편의 글이 나왔습니다.
박재연샘의 글 <그는 정말 평화롭게 갔을까> 가져오는 것도 잊지 마시고, 수업교재 731번부터 챙겨 오세요.
조정숙 반장 대신 제가 후기를 올려서 뭔 일인가 하셨죠?
반장님댁에 좀 걱정스런 일이 생겼다고 하네요.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역시 구관이 명관입니다. 서툰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