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에 비까지 어수선했던 하루였어요. 반가운 선생님들 뵈오니 날씨쯤이야 ~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낙지 춤 연습해야겠어요. 온몸에 힘을 빼고 흐늘흐늘하게 최소 2분 동안이라도 추어보라고 하셨어요. 체조와 단전호흡하시고 2시간 꼬박 운동을 하신다는 건강 비결도 알려주셨지요.
제1부. 이백의 매력
* 李白, 자 태백(太白, Lǐ Bái, 701.2.28-762.12).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술꾼에 시만 잘 썼던거 아니고 검술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했다.
시선(詩仙,Poet Transcendent),
주선(酒仙,Wine Immortal),
시협(詩俠, Poet Knight-Errant).
적선인(謫仙人, Banished Transcendent)이란 별칭. 1,100여 편의 작품.
* 당나라 국호 환원 - 705년(4세), 장간지(張柬之, 625-706. 시인, 재상)가 쿠데타로 무측천 실각시키고 중종(中宗)을 왕위에 복귀, 당나라 국호 복원.
* 712(11세), 두보 출생. 현종(玄宗, 685-762) 즉위. - 나이 뛰어 넘어 막역한 사이, 중국의 양대 산맥 이백과 두보.
* 쇠 갈아 바늘 만들기 - 미주 상이산(象耳山, 四川省眉山市境内, 海拔1236米)에서 수학 중 싫증나 하산, 청련향에서 무(武)노인의 철을 가는 절구공이 마철저(磨鐵杵) 보고 대화. 여기서 마저성침(磨杵成針), 철저마성침(鐵杵磨成針)이란 말 유래.
* 도교적 단련 - 718(17세), 대광산(大匡山, 四川江油市大康镇西北)에서 열공. 그 목표는 공성신퇴(功成身退). 이 말은 <노자>의 “功成 名遂(마침내 수) 身退 天道.” 그는 노자의 “知止不殆” 등 익힘.
* 풍골 창작법 - 720年(19세), 出游成都. 소정(蘇頲, 당시 최고 문장가)이 익주(益州, 주도가 成都) 자사(刺史)로 부임해 그를 만나려고 성도 행. 소정은 이백을 높이 평가, 촉 인재로 조정에 천거. 풍골(風骨) 완성 못했으나 앞으로 사마상여에 비견. 풍은 사상, 골은 표현법.
* 사마승정에게 사사 - 725年(24세), 사마승정(司马承祯, 647-735), 숭산(嵩山) 입산, 반사정(潘師正)에게 도교 방술법(方術法) 습득. 톈타이산(天台山) 은거. 측천무후-현종시기 궁정 초치 자주 받음.
* 여산 첫 등정 - 726(25세), 여산(庐山), 金陵(即今江苏省南京市). 扬州 등지 유람. 여산(廬山, Lushan National Park). 강서성(江西城) 구강시(九江市) 서남쪽.
* 이백의 시 <望庐山瀑布>의 “日照香炉生紫烟, 遥看瀑布挂前川. 飞流直下三千尺, 疑是银河落九天”이 유명. 이밖에도 미려산장(美廬山莊), 펄벅 별장(賽珍珠故居) 등.
* 첫 결혼 - 727(26세), 당 고조 이연의 어렸을 때 친구로 개국공신인 허소(许绍)의 막내. 허어사의 셋째 아들(許自正)의 딸(许紫烟, 一名许萱)이 이백의 첫 부인인데, 당시 허씨 집안은 몰락 상태.
* 황학루 - 728(27세), 맹호연(孟浩然)과 함께 황학루(黃鶴樓) 유람. 맹호연은 고양 양양(襄陽) 녹문산(鹿門山) 은거 중 40세에 낙양 과거 응시. 이백은 시<贈맹호연>“달 아래 술을 마시면 자주 취하고(醉月頻中聖), 꽃에 묻히어 임금 모시질 못 했네(迷花不事君)”이라며 술꾼 과시. 청주를 성인, 탁주를 현인.
* 원단구(元丹丘)와의 관계 - 730(29세), 백조산(白兆山) 도화암(桃花巖)에서 글공부 하다가 长安으로 가 몇몇 왕족과 고관들을 만났으나 별 성과가 없어. 떠돌다가 가을에 평소 숭앙하던 도가의 대가 원단구(元丹丘, 丹丘生,丹丘子, 烟子元丹)를 만남.
* 산동으로 이사 - 736年(35세), 가족 이끌고 동로(東魯, 현 山東 연주(兗州))로 가다. 그리 간 이유는 검술 배우려고 했다는 설, 친척들이 그를 백안시했다는 설, 셋째는 이미 그의 일가들이 산동에 살고 있었다는 설.
* 재혼과 이별 - 741(40세), 부인 허씨(許氏) 작고. 742(41세), 유씨(劉氏)와 동거, 곧 결별. 부인 비판한 시 <설참시증우(雪讒詩贈友)> 등. “저 부인의 음탕함은 / 메추라기 나는 것만 못하네.” 본처 후 정식 아내를 얻은 건 744년 당 고종 때 재상을 지낸 종초객(宗楚客)의 손녀 종씨부인.
* 한림원 한림학사 - 743(42세), 현종 부름으로 翰林院의 한림학사 되다.
당시 황실에는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 내각 문서 기초),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 황제 조서 등 중요문건 담당). 이백은 후자에 임명, 현종은 국정 참여보다는 황제의 여흥이나 시 창작에 동원.
* 두보와 여행 - 745(44세), 두보가 찾아와 둘 함께 여행, 이후 둘 다시 못 만남. 이백의 시에 나타난 교유인은 4백여 명. 두보 소재 시는 4수이나 가장 진한 신뢰. 이백은 계속 보국안민의 꿈을 품었지만 냉대와 극빈 속에서 유랑 생활.
* 원단구와 은거 - 751(50), 오랜만에 귀가 했으나 석문산(石門山)에 은거하던 원단구(元丹丘) 찾아가 은거. 마음은 어지러운 세상 근심.
정치서정시 <증하칠판관창호(贈何七判官昌浩)> 등 많은 작품이 현실의식을 강하게 나타냄.
* 계속 정치서정시 창작 -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지방 관료들을 통해 정치참여의 기회를 노렸으나 거듭 실의와 좌절 속에서 쓴 악부시 <원별리(远别离, 遠別離)>는 매우 유명한 정치서정시다.
* 안사의 난 - 752(51세), 이백은 안사의 난 근거지였던 유주(幽州, 옛 명칭으로 북방 경비 요충지. 今北京市城区西南广安门附近)로 여행, 군사훈련 목도. 755(54세), 안사의 난(安史之乱, 755.12.16-763.2.17)이 범양(范阳, 唐朝改幽州为范阳郡)에서 발발. 한 달 만에 낙양 점령.
* 안록산 - (安禄山, 703-757.1.29)은 이란계 무장 아버지와 터키족 돌궐(突厥)의 무녀(巫女) 어머니 사이에 랴오닝성에서 출생. 안(安)은 계부의 성. 6개국어 구사로 무역 중개인 거쳐 무관.
* 마외역 병변(马嵬驿(驛)兵变) - 756년7월15일, 태자 이형(李亨)이 숙종(肅宗)으로 즉위, 촉으로 피난한 현종은 추인. 태자 이형(李亨)은 황하 유역 담당, 왕자 이린(李璘, 永王, 현종의 16째 아들로 숙종의 이복동생)은 양자강 유역 방어 담당, 계속 반란군과 대치, 토벌전 전개하도록 현종이 지시.
* 양귀비의 최후 - 756(55세), 6월, 현종, 장안 떠나 피신 중 마외파(馬嵬坡)에서 양국충(楊國忠) 피살, 양귀비 목매어 죽다.
* 실의와 낙담 - 이백, 귀향길에 올라 팽택(彭澤, 현 江西省九江市彭泽县)에 이르렀을 때 체포당해 심양(寻阳, 尋陽) 감옥에 반 년 정도 투옥. 옥중 시 <상최상백우장(上崔相百忧章)>에서 최상(崔相, 崔涣. 재상 지낸 고관으로 현종과 숙종 측근)에게 자신의 무고함과 울분을 고하는 내용으로 “술잔 들고 큰 한숨 쉬니, 잔에 피눈물이 가득하네(举酒太息, 泣血盈杯)”
* 61세에 타계 - 762(61세), 早春, 卧病当涂(當塗, 당도. 安徽省马鞍山市当涂县). 최후 여행길 다녀온 후 11월 10일 오시(午时) 당도에서 타계.
* <임로가> - 죽음 앞에서 지은 임로가(臨路歌)>(제목이 <临终歌>의 오류일 가능성 제기).
大鹏飞兮振八裔, 中天摧兮力不济.(대붕비혜진팔예, 중천최혜역부제), 대붕이 날아 천하를 떨치고, 힘에 겨워 중천에 꺾였네... (중략)
제2부. 합평
김대원/문영일/이영옥/민경숙/곽미옥 (존칭생략)
다음시간에는 <두보의 성장과 유랑>을 강의하십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