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2)
지난 월요일에 이어 두 번째 <아버지의 해방일지> 수업시간에는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인물들 간의 갈등구조와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소설 마지막에 이릅니다. 책장을 덮는 순간 긴 여운에 빠져 밑줄 친 글들 다시 찾아보고 싶어 또다시 책을 펼칩니다.
전직 빨치산 출신인 아버지 고상욱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겹치듯 포개지면서도 살짝 빠졌다가 “항꾼에”(함께, 전라도 사투리) “또 올라네” 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미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소설 구성으로 볼 때 파국으로 치닫는 극적 갈등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고상호)간의 대립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시대적 아픔,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팽팽하게 전개됩니다. 아버지가 십대후반 빨치산에 몸담고 있을 무렵 아홉 살 작은 아버지는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던 둘째 형(고상욱)으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고아리의 할아버지)가 총살당하고 마을 전체가 불타는 참극을 목격합니다. 그 후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를 집안을 말아먹은 원수로 여기고 술꾼으로 살아갑니다. 이렇듯 두 형제의 긴장된 갈등은 장례식 마지막 날 아버지 유골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작은 아버지 모습에서 해소됩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화해가 이루어지는 건 두 형제뿐만 아니라 소설 속 화자인 딸 고아리와 아버지간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와 딸의 화해가 이 소설의 주요 포인트 같습니다. 스스로 선택해서 빨치산이 된 아버지와 빨치산의 딸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절감하는 딸 사이 갈등 또한 아버지의 장례식이 계기가 되어 사라집니다.
교수님께서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에 근거한 자기실현 즉 개성화(individuation)의 일례로 아리의 심리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아리의 무의식에 새겨진 그림자(shadow),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이 곧 아리가 자기(self)를 실현해가는 과정인 듯합니다. 융은 무의식과 의식이 하나로 통합될 때 온전한 자기가 될 수 있으며 자기는 우리 마음의 전부이며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의식에 드러난 자아(ego)로서 아리가 무의식에 드리워있는 자기(self)를 만나는 길에 그림자, 아버지를 만나 갈등을 겪은 후 마침내 화해에 이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냉정하게 성찰하는 아리를 발견할 때마다 아버지와 닮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리는 어렸을 때 엄마보다 아버지를 더 따르며 아버지와 단단한 애착 관계를 형성합니다. 네 살 무렵 어느 여름 미역을 감던 아버지의 벗은 몸에서 자신에게 없는 걸 발견하고선 결여를 느끼는 장면이 있습니다. (200쪽) 아버지와 딸 사이 분리가 이루어지는 이 대목에서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가 떠오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대상이 아들과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와 딸로 설명합니다. 엘렉트라는 그리스 비극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의 딸입니다. 그녀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 클리타입네스트라를 오레스테스와 함께 죽입니다. 부모와 고착된 관계가 자연스럽게 분리되지 못한 채 성장할 경우 오이디푸스나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겪을 수 있습니다.
아리는 장례식에 찾아오는 아버지의 빨치산 동지들과 동네 이웃 조문객들, 그리고 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하게 듣고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을 이해합니다. 얼핏 묵직하게 다가올 스토리가 그 시절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진한 사투리로 생경한 듯 한층 가볍게 보여주며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리의 관계 회복으로 잔잔한 감동까지 안겨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