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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키에 꽃미남, 공자를 만나다 (평론반)    
글쓴이 : 박진희    22-10-11 15:51    조회 : 3,850
한국의 가을은 덕스럽고 친절하며 다정스런 최고의 계절입니다. 어제는 경복궁에서 쌍무지개도 만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답니다^^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와 색깔을 기대하며 임헌영교수님의 지도로 정치가, 작가, 시인, 사상가, 평론가, 저술가인 공자를 공부하고 고경숙 선생님께서 합평시간을 빛내주셨습니다. 그리스의 철학가, 소크라테스 (기원전 470-399)가 공자 보다 훨씬 젊으니, 동양의 철학이 서양보다 훨씬 앞섰다고 봐야겠지요.  

(제 1 부) 공자의 배경과 정치적 야망 

1.  공자 (기원전 551-479)의 출생과 성장
-- 그의 선조는 은(殷, 商) 왕가의 후손인 미자(微子). 독재자 주왕(紂王)의 맏형인 그는 아우와는 달리 명망 높은 충신으로 덕망이 높았음. 은을 정벌한 주나라는 관용책으로 미자에게 봉토(商丘, 현 하남성)를 하사하여 송(宋)이라 불렀고, 나중엔 송나라가 되었음
-- 그의 6대조가 공씨를 성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계속 관직에 머물렀으나, 무사였던 아버지 숙양흘(叔梁纥)이 송나라의 전란을 피해 노(鲁)나라로 피난, 곡부(山东省 曲阜市)에 정착
-- 숙양흘의 아내(施氏)가 아들 없는 9녀를 낳았기에 첩에게서 아들(孟皮)을 얻었으나 선천적인 다리 장애로 걷지도 못해 건장한 아들을 소망. 동료 무사의 셋째 딸, 20세의 顔徵在이 66세의 숙양흘과 관계를 가져 공자 출산
-- 공자는 3세 때 아버지가 죽자 사생아였던 처지라 정식 입적도 못한 데다 유산도 전혀 못 받아 어머니가 독립해서 어렵게 지내다가 어머니마저 눈이 멀어버려 험한 일도 마다할 수 없는 처지로 지내다 그가 16세 때 작고 
-- 공자는 별다른 기술 습득도 못한 곤궁 속에서 약초를 캐거나 고기잡이와 사냥하기 등등부터 집수리와 연장도 만들며 어렵게 지냄. 그런 가운데도 다행히 건장하게 자라나 9척을 넘는 장신구라 ‘키다리’란 별칭이었으며, 15세경부터 공부에 뜻을 두며 독학.
-- 어렸을 때부터 제사의례를 즐기며 예와 악을 중시, 전쟁과 혼란을 피하려면 옛 평화로웠던 왕도정치 시대(주나라를 전범)의 질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자신의 계급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이런 자세는 결국 그로 하여금 전혀 불가능한 자애로운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고군분투
-- 19세 때 첫 일자리로 얻은 게 위리(委吏, 관공서 창고지기를 겸한 회계 관리)로 생활의 안정을 찾은 그는 친척의 주선으로 송나라 출신의 비슷한 처지의 처자(幵官氏)와 결혼. 이듬해에 승전(乘田, 국유목장 관리직)으로 일자리를 옮기고 아들(鯉)을 얻음. 
-- 2년 만에 승전 자리를 사직한 공자는 자신의 꿈이었던 사설학원을 개설(22세),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학문도야.
-- 30세가 되면서 그는 학문의 도가 섰다고 느껴 평소부터 존경하던 주나라를 견학. 제자 南宮敬叔이 막강한 아버지(孟僖子)를 통해 노나라 왕 소공에게 공자의 처지를 호소해 수레 한 대에 말 두 마리와 마부까지 하사받음. 34세의 공자는 드디어 남경경숙을 대동하고 출발, 송, 위, 정 나라를 거쳐 주의 수도 낙양의 도서관에서 노자를 우연히 만나 교육을 받음.
-- 많은 자료를 입수하여 노나라로 귀국한 공자는 더욱 분주해졌고, 제자들에게는 더 존경받는 대학자의 반열에 들어서 전국에서 3천여 제자들이 운집.

2. 나라 선택과 정치참여
-- 약소국인 노나라 출신으로 보다 안전하고 힘센 나라를 찾던 그는 바로 이웃인 데다 소공 왕이 망명한 제(齊)나라를 선택. 
-- 소국이라도 인재를 열심히 구한다면 비록 소국이라도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주나라의 태공망이 세운 제나라의 번창함을 즐기던 공자가 경공을 만나 정치적인 명 대화를 나눈 대목은 아주 유명 --> 君君臣臣父父子子(「颜渊」)
-- 이 한마디로 깊은 신뢰를 얻은 공자에게 경공은 땅을 봉할 생각까지 있었으나 그를 질투하던 재상 안영의 만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감. 그러던 차에 노나라의 왕(소공)까지 죽자 공자는 7년만인 42세에 고국으로 돌아감.
-- 노나라는 여전히 정세가 어지러웠으나 공자는 오로지 교육에 전념하며 그 명성은 도인의 경지. 나라가 안정되어 새 정권(昭公의 동생定公)이 들어서자 공자는 이제 벼슬도 마다하지 않게 되어 51세에 한 도시의 행정을 맡아 시범을 보여주자 곧 국토건설을 책임 맡는 장관급인 사공(司空)
-- 52세에 법률을 관장하는 대사구(大司寇, 법무장관 격). 공자가 현실정치에 투신하자 가장 두려워진 건 이웃 강국 제나라. 제의 경공(景公)은 명재상 안영(晏嬰)과 함께 이런저런 구실로 트집 잡을 기회를 가지려고 노나라에 협곡회맹(夹谷会盟)을 제의하여 두 나라의 왕과 안영-공자도 배석. 공격적인 제나라의 고자세에도 공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밀어붙여 결국 경공을 감명시켜 제나라가 약탈했던 노나라의 땅까지 돌려받음. 52세에 대석학다운 문화외교의 대승리.
-- 국내의 반란까지 수습함으로써 공자의 명성은 드높아져 56세에는 대사구로서 정승 직무까지 겸임
-- 제나라가 끝내 침략의 야망을 버리지 않은 채 미녀 80명으로 구성된 가무단과 명마 120필을 노나라 왕에게 선물함. 공자는 이들 가무단을 거절하라고 왕에게 직고 했으나 계손자의 설득에 왕은 응락, 그 뒤부터 왕은 이 가무단의 연주에 반해 점점 정사는 흐려지기 시작
-- 공자의 권유를 무시한 왕에게 실망하여 56세에 모국을 떠남.
-- 이후 13년간 주유천하로 여러 나라들(衛, 陳, 鄭, 宋, 陳, 衛, 晉, 衛, 陳, 蔡, 楚, 衛)을 돌아다니며 교육과 구직을 겸함. 노나라로 귀국한 몇 년 후, 73세에 세상을 떠남.

3. 공자의 덕치사상
-- 공자는 세계4대 성인 중 현실정치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지극히 세속적인 야망가. 그에게 학문이나 사상이나 예술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정치 지도자를 내세워 국민 모두를 인간다운 인격체로 승화시키기 위한 이상국가의 창출을 위한 장치. 그래서 일생 동안 자신의 이론을 현실정치에 대입시키려고 온갖 고초 겪음.
-- 그에게 “정치란 올바름이다. 그대가 솔선수범하면 누가 감히 바름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政者, 正也. 子率以正, 孰敢不正?, 「晏然」)”. 
-- 정치란 마음이 곧은 인재를 등용하여 마음 굽은 소인 위에 올리면 인민이 복종하고, 마음이 굽은 소인배를 등용하여 곧은 인재 위에 놓으면, 인민은 심복하지 않으리라(哀公问曰:何为则民服? 孔子对曰:举直错诸枉, 则民服;举枉错诸直, 则民不服. 「爲政」).
-- 현실정치에 투신해 자신의 이론을 시험한 기간은 극히 짧았고 대개는 왕을 설득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만들고자 주유천하. 그럴 기회도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제자들을 길러 그런 지도자가 되도록 교육. 지도자로 손색이 없는 인간상, 사회지도층 인물로 등용되기를 바램.
-- 군자가 될 조건으로 공자는 어진 마음가짐(仁)를 거론하며, 참다운 인이란 아래 다섯 가지라고 강조
“공손하면 업신여김을 면하고 너그러우면 인심을 얻고 믿음성이 있으면 사람들이 신뢰하고 민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고 은혜를 베풀면 인민은 저절로 협력하게 된다.(子張問仁於孔子. 孔子曰: “能行五者於天下, 爲仁矣.” 請問之. 曰: “恭ㆍ寬ㆍ信ㆍ敏ㆍ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 陽貨」).

4. 공자의 교육 목표
(1)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덕행(德行)을 실천할 줄 아는 단계, 
(2) 정확하고 우아한 언어표현으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낼 줄 아는 언어교육, 
(3) 관리로서 손색이 없는 정무능력을 갖춘 정사(政事)능력, 
(4) 교양과 예의범절과 상식을 갖춘 문학예술 교육

미학상도 인(仁)과 예에 바탕 했기에 “시로 감흥 일으키고, 예(禮)로 질서 세우며, 악(樂)으로 인격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泰伯」)". 시(곧 문학)의 기능을 흥(感發志意), 관(풍속의 성쇠), 군(무리 짓되 붕당 않음), 원(원망하되 노하지 않음)의 4가지 기능이 곧 문학의 효용 --> 미학과 선(善)을 일피시키는 재도(載道)문학

(제 2 부) 합평
박옥희 / 민경숙 / 이영옥 / 곽미옥 / 유병숙 / 김유 (존칭생략)

다음 주에는 그동안 평론반 선생님들의 수상, 출판과 업적을 기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아, 기다려지네요!


문영일   22-10-14 15:21
    
박진희 선생께서 장문의 후기를 올리셨군요.
그날 결석하여 궁금했는데 올려주신 note로 공부 잘 했습니다.

 합평글은 메일로 잘 보았습니다. 글들을 얼마나 잘 쓰시는지...
합평도 재미있었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박진희   22-10-17 07:06
    
문선생님,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의 말씀을 대략 적은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글 수준도 높았지만 합평은 여전히 도움이 되었고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오정주   22-10-15 00:56
    
비가 추적추적내리더니
가을 하늘이 얼마나 예쁜지 모두들 나들이 가셨나봅니다.
진희쌤  정성스러운 후기는 다들 보셨지만
댓글은 속으로만 달고 말이죠. 저도 그랬습니다. ㅎㅎ
암튼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 이었던 공자님
하나 더 추가하면 미식가였답니다.
     
박진희   22-10-17 07:10
    
공자님이 미식가였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네요^^
반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