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4~6장
7월 17일 차라투스트라 세 번째 수업에 다룬 내용은 2부 4~6장 “사제에 대하여” “도덕군자에 대하여” “잡것에 대하여”입니다.
니체는 사제 도덕군자 잡것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힘에의 의지’가 결여되어있다고 봅니다. 니체에게 힘이란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내면을 강화, 상승시키는 힘 모두 아우릅니다. 힘 의지로 똘똘 뭉친 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는 반면 힘 의지가 부족해 타인의 눈치를 보며 예속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텍스트 읽으며 두 대목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피는 저들의 것과 가깝다. 그래서 나 나의 피가 저들의 피 속에서조차도 존경받고 있는지 알고 싶다.” (책세상 150쪽 17~18행)
차라투스트라는 왜 자신의 피가 사제의 것과 가깝다고 했을까요. 고통에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도 사제들과 닮았습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즉 니체가 새롭게 펼치는 사유는 기존의 방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성직자들은 신에게 의지하여 기도와 믿음으로 고통스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렇듯 외부의 힘에 의존한 구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니체는 각자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 힘을 키워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덕이란 말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저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가! 저들이 ‘나는 정의롭다’고 말 하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그것은 언제나 ‘나는 앙갚음을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157쪽 23~24, 158쪽 1행)
‘정의롭다’가 어떻게 ‘앙갚음을 했다’로 들리는지 윗글이 이해가 되지 않아 갖고 있는 다른 번역본 찾아봤습니다. 민음사 164쪽 주석에 독일어 gerecht (정의롭다) gerächt (복수하다) 두 단어 발음이 서로 비슷하다고 적혀있습니다. 번역본으로 읽는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정의와 복수를 연결하는 언어유희처럼 들립니다.
플라톤의 <국가> 1편에선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대화를 나눕니다. 정의는 각자 타고난 본성에 따른 자신의 몫을 충실히 행할 때 실현되는 것으로 봅니다.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니체는 플라톤의 대가였지요. 플라톤의 정의를 공격하면서 복수까지 떠올렸을까요.
니체는 1887년 발표한 <도덕의 계보> 논문에서 주인 도덕과 노예도덕으로 나누어 도덕을 설명합니다. 로마인과 로마 지배 아래 있던 유대인의 도덕관을 각각 독수리와 양으로 비유합니다. 로마인처럼 정신적으로 고귀한 자는 힘센 독수리로 주인 도덕을 만듭니다. 반면 내면이 원한과 복수 감정으로 쌓인 유대인들은 나약한 양처럼 노예 도덕을 지닙니다. 힘 의지의 유무에 따라 귀족과 천민으로 나누는 니체는 힘 있는 고귀한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갖는 감정을 ‘거리의 파토스’라고 부릅니다. 니체가 고귀함과 힘에의 의지를 연결하면서 거리의 파토스를 느껴보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 니체 철학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의지하고 싶은 누군가 곁에 있어줬으면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 아닐까요. 그럴 때마다 니체는 어김없이 한마디 툭 던집니다. 꿋꿋하게 헤쳐 나가라고, 스스로 강해지라고 가혹하게 내몹니다.
김수영 <구름의 파수병> 시와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그림도 감상했습니다. 산정에 올라선 구름의 파수병 김수영 시인과 안개 자욱한 바다 위 절대 고독자 뒷모습에서도 거리의 파토스와 힘에의 의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