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7~8장
<타란툴라들에 대하여, 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
7월 24일 월요일 차라투스트라 네 번째 시간 <타란툴라들에 대하여> <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지난 시간 ‘사제, 도덕군자, 잡것들’에 이어 평등을 설교하는 자와 민중의 하인 노릇을 하는 현자에 대해서도 니체는 거침없이 비평합니다.
7장에 등장하는 타란툴라는 지중해 연안에서 볼 수 있는 독거미입니다. 니체는 당대 그릇된 평등 개념을 지닌 정치인 철학자 종교인을 타란툴라에 비유합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평등과 니체가 생각하는 평등이 어떻게 다른 지 살펴봅니다. 그들에게 평등이란 힘 의지가 부족한 자의 내면에 쌓인 질투 시기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스스로 힘을 키워 나가지 못하는 약자는 강자에게 원한 감정(르상티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약자는 강자가 자신과 동등하길 희망하며 절대적이고 동일한 평등을 부르짖습니다.
니체는 약자가 외치는 하향 평준화된 평등을 비판하며 사람은 평등하지 않고 평등해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책세상 169쪽 3~4행) 니체에게 평등은 제각기 지닌 힘 의지가 다르듯 개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다양한 가치를 뜻합니다. 니체는 상대적, 관점주의적 입장을 평등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 동등(ison)에 대하여 산술적 비례와 기하학적 비례 둘로 나눠 설명합니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산술적 평등은 약자의 평등이며 기하학적 평등은 강자의 평등입니다. 힘에의 의지가 삶과 존재의 원동력인 니체 철학에선 힘 의지를 통한 자기 극복(self overcoming)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삶의 주인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바로 위버멘쉬입니다. 7장 핵심 대목 옮겨봅니다.
“생은 높이 오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높은 경지를 필요로 하고 있기에, 생은 계단을, 계단과 오르는 자들이 범하는 모순을 필요로 한다. 생은 오르고자 하며 오르면서 자신을 극복하고자 한다.”(169쪽 19~22행)
위 대목에서 “모순을 필요로 한다”에 주목해봅니다. 『차라투스트라』 부제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란 글귀 자체만 떼어놓고 보면 어떻게 모든 사람을 위하면서 동시에 아무도 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니체는 그 모순마저 받아들입니다. 부제와 비슷한 예로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가 있습니다. 동일한 것은 운동하지 않으며 회귀할 수 없지요. 그럼에도 니체는 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합니다. 이 역시 모순 언명이지요. 니체가 모순을 긍정하는 건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존 철학의 한계를 자각해서일까요. 영원히 반복되는 동일한 조건에서도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가 되라고 니체가 말하는 것 같습니다.
8장 이름 높은 현자란 대중, 민중(mass)의 하인 역할을 자처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들을 비판하며 부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니체는 이들이 쓰고 있는 사자의 거죽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며 (173쪽9~10행) 대중에게 영합하는 철학자의 얄팍한 지혜에 불만을 터뜨립니다.
1부 1장 ‘세 변화에 대하여’에서 낙타 사자 어린아이가 나옵니다. 사자는 어린아이가 상징하는 새로운 가치 창조 단계까지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대신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39쪽 18행) 라며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38쪽 17행)라는 용에 맞섭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는 사자를 니체는 눈여겨봅니다. 1부 1장에 자유의지를 뜻하는 사자가 2부 8장에서는 사자의 거죽을 쓴 철학자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다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