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수치심과 자존심 사이
⸀작은 사건」과 ⸀두발 이야기」
4월 22일 루쉰(1881~1936)의 『외침』에 수록된 ⸀작은 사건」과 ⸀두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문학 작품에 담긴 인간 삶과 죽음 탐욕 사랑 등을 면밀하게 이해하려면 작가의 인생관 말고도 그가 살던 당대 역사적 흐름과 정치 상황을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쉰도 예외가 아닌데요. 혼돈과 격정의 시대를 마주한 루쉰에게 무엇보다 절박했던 건 무지한 중국인들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루쉰의 노력과 열정이 그의 작품에 잘 녹아 있습니다.
⸀작은 사건」(1919)은 루쉰이 ‘나’로 등장하는 1인칭 서술자 시점의 단편입니다. 인력거를 타고 S문에 도착할 즈음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인력거를 가로질러 건너려던 한 할머니가 인력거 앞에 넘어지고 맙니다. 그녀의 저고리가 인력거 채에 걸려서인데 얼핏 보기에 별일 아닌 듯합니다. ‘나’는 인력거꾼한테 가던 길 계속 가자고 재촉하지만 그는 쓰러진 노파를 부축해 가까운 파출소로 향합니다.
“이때 돌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쓴 그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갈수록 점점 커져 우러러봐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나에 대해서도 점점 위압적인 존재로 변해 가죽 두루마기 안에 감추어진 내 ‘소아’(小兒)를 쥐어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린비 73~74쪽)
위 대목에서 루쉰은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인력거꾼에게서 새 시대를 이끌 희망과 용기를 봅니다. 반면 교육부 관리였던 자신은 한낱 구세대의 부끄러운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작아진 루쉰의 또 다른 면이 드러난 이야기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38a) 심사숙고하면서 성찰하는 삶의 자세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요구되겠지요.
카프카의 『소송』은 “수치심은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 남아 있을 것처럼 보였다.”로 끝납니다. 카프카 소설에 “머리를 가슴 깊숙이 파묻고 있는 남자”가 자주 나옵니다. 발터 벤야민은 수치를 느끼는 자가 취하는 이런 제스처를 눈여겨봅니다. 벤야민은 에세이 ⸀프란츠 카프카」에서 수치심의 이중 얼굴, 타인 앞에서의 수치심과 타인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을 언급합니다. (『카프카와 현대』 92족)
루쉰의 작은 사건은 더 이상 작은 사건으로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미미해 보이지만 비겁한 자신을 통렬하게 반성하며 양심의 가책마저 느낍니다. 루쉰에게 잊히지 않을 만큼 깊이 새겨지겠지요. 카프카의 『소송』 마지막 글귀처럼.
⸀두발 이야기」(1920)는 변발 장발 단발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희생자들의 시련이 루쉰의 대변인 N의 비판적인 시각으로 펼쳐집니다. 변발을 강요당하는 장면, 장발을 해야 살아남는 태평천국의 반란, 신해혁명을 겪으며 단발로 자유로워진 장면까지 그립니다. 개화파에 의해 내려진 단발령으로 혼돈을 겪은 조선 말기 상황도 떠오릅니다.
“이봐, 자넨 알고 있겠지. 머리털이 우리 중국인의 보배이자 원수라는 걸 말야. 예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땜에 의미 없는 고통을 맛봐야 했는지 말이야.” (그린비 76쪽)
위 대목이 두발 이야기의 핵심 같습니다. 양날의 검처럼 중국인의 정신을 지배해온 두발은 그들이 부여잡고 싶은 자존심일까요. 인간의 정신은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단단하지요. 때론 바람 불면 훅 날아가 버릴 듯 허약하지만 인간 영혼이 깃든 정신은 육체보다 우월하다고 오랫동안 여겨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친족이나 친한 친구가 죽으면 애도의 표시로 무덤에, 또 성년이 되면 길러준 보답의 표시로 고향의 강에 제 머리털을 잘라 비치곤 했습니다. 거기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 가운데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첫 장면에 나옵니다.
“여기 내 머리에서 자른 머리털 두 타래를 들고 있나이다.
하나는 나를 길러준 이나코스 강에 바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늦었지만 아버지 무덤에 애도의 뜻으로 바치나이다.” (5행~8행)
이렇듯 머리털을 바치는 행위에 그리스인들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머리털이 그토록 소중한 건 머리카락 한 올마다 보이지 않는 생명력의 기운이 스며들어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