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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적 개인 (소설반 22.10.25)    
글쓴이 : 김성은    22-11-01 08:17    조회 : 3,830

소설반 가을학기 7주차 강의는 <소설의 인물>을 주제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근대소설의 인물 / 문제적 개인

서사시의 주인공은 엄격히 말하면 결코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다. 서사시의 대상이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운명이라는 사실은, 옛날부터 서사시의 본질적 특징 중의 하나로서 간주되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왜냐하면 서사시의 우주를 규정하는 가치체계의 완결성은 너무 유기적인 전체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 속의 어떠한 요소도 독자적으로 완결시키고 또 자신을 강하게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내면성을 발견하고 하나의 독자적 인격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영혼을 독자적이고 비교될 수 없는 실체로 설정하는 윤리의 전지전능성은 이 세상에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요원하다. 삶이 삶으로서 그 자체 속에서 내재적 의미를 찾게 되면 유기체의 모든 카테고리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카테고리가 된다. 개인적인 구조와 외모는 단지 부분과 전체가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균형의 산물이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고집하면서 방황하는 고독한 인격체의 산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이 이처럼 완결된 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언제나 양(量)적인 것이다. 사건이 그 안에서 구체화되어지는 일련의 모험은, 그 사건이 한 민족이나 아니면 한 씨족과 같은 커다란 삶의 유기적 복합체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의미를 가지는 한도 내에서만 그 무게를 지닌다. ……서사적 개인, 즉 소설의 주인공은 외부세계에 대한 이러한 낯설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세계가 내적으로 서로 동질인 한에 있어서는 인간 또한 질적으로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물론 영웅과 악당, 의인과 죄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자기 동료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클 뿐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의 장중한 말이라도 그것은 가장 우둔한 바보조차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내면성의 독자적 삶은, 인간들 사이의 차별이 메꿀 수 없을 정도의 간극으로 변하고, 신들이 침묵함으로써 어떠한 희생이나 법열(法悅)도 신의 말문을 열어 비밀을 털어놓게 할 수 없을 때에만이 가능하게 되고 또 필연적이 된다. 또 행동의 세계가 인간과 분리되고 이 독자성 때문에 공허해지며, 그리고 행동의 참된 의미를 자기 내부로 받아들여서는 이를 행동 속에서 상징으로 변화시키거나 상징 속에 용해할 수 없게 될 때, 즉 내면성과 모험이 영원히 서로 분리될 때에만이 독자적 삶은 가능해지고 필연적이 되는 것이다.(루카치)

루카치: 소설이란 “문제적 개인이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서는 동경과 모험에 가득찬 자기 인식에로의 여정을 형상화한 것.”

: 루카치의 초기 저작이고 낭만주의적 성향이 심화하던 때이기에 말을 아주 유려하고 화려하게 하는 경향이 좀 강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외부 세계에 대한 낯설음에서 생겨난다고 한 뜻은 예전에는 외부 세계라는 것이 인식 가능하고 그다음에 해석 가능하며 그다음에 어떤 완결된 형태로 우리한테 주어져 있는 세계였다는 것이라면, 이제는 그 세계가 어떤 미지의 영역으로 뒤바뀌어서 다가오게 되었다고 이해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루카치식의 규정이 초기 소설들에는 전적으로 걸맞다.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면 부르주아들의 모험 그게 바로 소설이었다. 신이나 영웅이나 귀족들이 하던 그 모험을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지배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르주아의 모험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부르주아의 모험이 이전 시대의 모험과 성격이 다른 게 있다면 이전 시대의 모험들은 현실이 아니었고 그들이 옳다고 믿거나 아니면 가상의 그런 공간에 대한 모험이었다면 부르주아들의 모험은 거의 현실적이다. 물론 이것도 그 이전과 비교해서 현실적이라는 거지 실제로는 난점들이 많다.

최초의 소설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작품도 결국에는 부르주와의 모험이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주 허술하게 짝이 없는 소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까지 읽힐까 생각해 보면 거기에 순수한 형태의 부르주아들의 욕망이 있다. 이 세계를 정복해서 자신의 어떤 왕국으로 만들고 싶다는 가장 보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로빈슨 크루소가 살아남는 과정을 보면 진짜 엄청나게 잔인하다. 그 잔인함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도덕적 판단이나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어물쩍 그런 걸 건너뛴다. 근데 그 당시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모든 요소들 어떤 배를 타고 항해를 하고 먼 미지의 나라로 가서 농장을 운영하고 무인도에 정착하고 그 험난한 설산을 통과하면서 늑대들과 싸우고 이 모든 모험들이 사실은 최초의 소설로 만들어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사실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당대인들의 욕망이 세워졌는지를 증언하는 작품이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실제 작품들을 보면 근대의 이중성을 이미 다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개인이 자유로워짐으로써 개인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모험을 떠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미지의 세계 떠나는 그 모험들이 이후에는 제국주의의 선전 수단이 되어 침탈 침략 정복 이런 것들을 옹호하는 어떤 논리로도 사용이 된다. 소설이라는 것은 근대가 태어날 때 근대라는 사회가 갖고 있었던 어떤 내적인 모순을 이미 자기 장르 안에서 똑같이 품고 태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글들을 볼 때 그냥 개념적으로만 이해하면 약간 곤란하다는 뜻이다. 민주적이고 옳은 변화라고 해서 그 안에 어떤 한계가 없다거나 그 안에 어떤 모순이 없다거나 옳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순수하거나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이런 또 하나의 관점을 잃지 않고 이해하면 좋겠다.

문제적 개인이라는 건 말 그대로 한 개인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두 번째로는 더 이상 어떤 공동체 체제가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어떤 관념들 혹은 지향하는 어떤 가치들이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게 서로 충돌하고 부딪히기 때문에 그 개인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동경과 모험에 가득 찬 자기인식에로의 여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결국에는 문제적 개인이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선다는 것이다.

정신적 고양이라는 말은 흔히 우리가 요즘 하는 말로 하면 무언가를 회복하는 것이다. 한 편의 소설은 이 사람을 보라는 한 문장을 길게 늘인 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얘기를 우리가 많이 듣는다. 결국 소설의 인물이라는 것은 자신이 어느 순간 어떤 결핍을 깨닫고 그 결핍된 것을 찾아나서는 과정이다. 루카치가 말했던 이 정신적 고양이라는 것도 뭔가 정신적으로 결락 누락되어 있는 것들 결핍되어 있는 것들을 되찾는 그런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근대 인물의 특징이다.

그 잃어버린 것 혹은 결핍된 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여기에서 실질적인 차이들이 발생한다. 그러니까 삶의 의미를 찾는 거는 회복한다는 관점하고는 좀 다르다. 뭔가를 추구하고 무언가를 채굴하고 무언가를 발견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냥 간단한 용어로 정리를 하면 회복과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전에는 회복할 것도 없고 발견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근대 소설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회복하려 애쓰는 인물이고 무언가를 발견하려 애쓰는 인물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 루카치 식의 소설에 대한 개념 정의가 오늘날의 모든 소설에 일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하더라도, 본질적인 어떤 태도의 문제로 보았을 때는 뭔가를 회복하고 발견하려는 성격을 지닌 게 바로 현대 소설의 인물이라고 본다면 사실은 유효한 개념이 아닐까 한다. 


_ 이태원 사고 피해자와 유족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