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상사에서 최장기 금서였던< <묵자>>, 이 책은 정몽주가 구해 정도전에게 전했다고 한다. 묵자(墨子, 기원전 476, 480?~기원전 390, 420?)는 교육자에 과학자, 군사학자에 실천가, 평화주의자로 묵가학파의 창시자. 그는 대망을 품고 공자의 본향 노나라에 유학, 동주(東周)의 사관이었던 사각(史角)의 후손에게 배웠다.
양계초(梁啓超,1873~1929)가 “작은 예수, 큰 마르크스”라고 불렀던 그는 중국의 첫 사회주의 혁명 이론가이자 실천자로 평가받았고, 마오쩌둥은 묵자를 “고대 변증유물론의대가”라고 했다. 이런 인물이기에 오랜 금서도서였음에도 묵자기념관(墨子纪念馆)이 산동성 등주시(滕州市 荆水河滨, 龙泉广场)에 세워져 있으며, 간소한 장례를 치뤘으므로 묘지는 어딘지 알 수 없다.
묵자란 이름은 그가 서역의 흑인이라는 설부터 이마에 먹을 새긴 묵형(墨刑)을 받았다거나 살결이 검었다, 목수로 먹줄을 튕긴 데서 유래했다는 등 분분하지만 노동자였음은 명백하다. 어렸을 때 목동을 거쳐 목공기술을 익혀 그 분야의 실력이 경지에 이르렀다.그는 공맹과는 달리 초라한 차림새로 혼자 몇몇 나라들((宋,齐,郑,卫)을 다니며 유세를 폈는데, 감투를 잠깐 쓰기도 했지만 대개는 하사하려는 봉분도 사양하고 오로지 자기 사상을 펼치는 걸 주요 업으로 삼았다.
『묵자』는 묵자를 포함한 묵가들 전체의 사유와 논쟁의 기록이다. 다음과 같은 10가지 주제는 각각 『묵자』를 구성하는 편명이기도 하다.
1. 상현(尙賢) : 현명한 사람을 숭상해야 한다.
2. 상동(尙同) :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
3. 겸애(兼愛) :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4. 비공(非攻) : 전쟁을 금지해야 한다.
5. 절용(節用) :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한다.
6. 절장(節葬) : 장례를 간소화해야 한다.
7. 천지(天志) :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8. 명귀(明鬼) :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9. 비악(非樂) : 사치의 상징인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
10. 비명(非命) : 주체적 노력에 반하는 숙명론을 거부해야 한다.
얼핏 살펴보아도 이 열 가지 주제들은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윗사람의 뜻을 숭상하고 따라야 한다거나 하늘과 귀신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인 차원의 사랑인 '겸애'는, 수직적인 독재론이나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초월적인 종교론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자』를 자세히 읽어 보면 이러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 열 가지 주제 가운데 핵심 주제인 '겸애'이며, 다른 주제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맹자』와 『장자』, 『한비자』,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서 묵가의 핵심 주제로 '겸애'를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각종 과학기술과 최고 실력자로서의 축성술과 목공예로 무장한채 많은 제자들(3백명 설)을 길러 탄탄하게 조직하여 직접 반전평화운동을 실천했다. 그가 직접 실현했던 업적 중 유명한 역사적인 사실은 「공수편(公輸篇)」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전국시대의 강대국 초나라가 당대의 명장(名匠)이었던 공수반(公輸般)이 만든 성벽 공격용 신무기인 운제(雲梯)를 제작하자 오로지 이 무기만을 믿고 송나라를 침공하려 하자 묵자는 이 침략전쟁을 막고자 제나라에서 10여일이나 걸려 초나라로 향했다. 왕과의 대면에서 그는 침략전쟁의 부당성을 역설했지만 그 야욕을 버리지 않자, 왕 앞에서 공수반과 마주보며 모의전을 치러보자고 제안했다. 그가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성으로 삼고 온갖 잡동사니들로 무기를 만들어 공수반에게 운제를 이용하여 공격해 보라고 했다. 공수반이 아홉 번이나 교묘한 방법으로 침공을 시도했으나 묵자는 다 너끈하게 막아내자 드디어 공수반은 초왕에게 “소인은 묵자를 막아낼 마지막 방법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여운을 남겼다.
『장자(莊子)』에서는, 묵가의 무리가 "대부분 짐승 가죽옷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남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은 굶어야 하고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옷을 주면 자신은 춥게 지내야만 한다. 삶에 지친 사람을 대신하여 노동을 하면 그 자신이 피로해질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들이 묵가의 무리였던 것이다.
묵가의 무리는, 이러한 희생이 너무나 힘든 일이긴 하지만,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확신했으며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 정신은 이기심이나 탐욕, 질투,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위정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여기서 묵가는 위정자들로 하여금 겸애의 정신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논리 장치를 고안한다. 그 논리 장치가 바로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긍정하는 초월적 종교론이다.
유가와 묵가 사이의 논쟁은 장자(莊子)가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논쟁을 '유가와 묵가의 시비논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강렬했다. 묵가가 격렬하게 유가를 공격했던 이유는, 유가에서는 말로만 사랑을 외칠 뿐 그 사랑의 완성이 기본적으로 자기희생과 이타적 행위에 기초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묵가에서는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해야만 의미가 있으므로 묵가에게는 번잡한 예절, 무용한 장례 의식 혹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음악 활동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유가의 무리가 위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유가에 대한 묵가의 치열한 공격은 묵가 사상을 역사 속에 묻히게 만든 한 가지 이유였다. 맹자 시대에 맹자보다 묵자가 훨씬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