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물다
5월 20일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2부 27장~49장까지 읽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되듯 전개되는 1부와 달리 2부는 현실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 가운데 비현실적인 요소가 사이사이 보입니다. 가령 2부에 새로이 등장하는 후쿠시마 Z**마을 전직 도서관 관장이던 고야쓰는 이미 작년 산책길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뜬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산 자처럼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2부의 주요한 인물로서 주인공 ‘나’와 대화 나누는 장면에서 하루키 작가가 이해하는 인간 심리의 면면이 보입니다. 칠십대 중반의 고야쓰가 던지는 메시지들은 바로 실제 비슷한 연령인 하루키의 대변인 같습니다.
“제 영혼도 마땅한 시간이 흐르면 어딘가로 사라져 무로 돌아갈 테지요. 영혼이란 어디까지나 과도적 상태에 지나지 않지만 무는 그야말로 영원합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표현을 초월한 것입니다. (...) 고독이란 참으로 무정하고 쓰라린 것이랍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2부 44장 441면)
“그 수수께끼의 도시에 남겠노라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셨다고요. 하지만 당신의 진정한 의지는 달랐는지도 모릅니다.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 도시를 나와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요.” (444면)
이들 대화가 주로 이루어진 장소에 주목해봅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온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적한 시골 도서관 관장으로 옮겨갑니다. 깊은 산골 겨울은 눈이 자주 내리고 추위가 오래 갑니다. 고야쓰의 제안으로 겨울동안 도서관 안에 있는 반 지하 정사각형 방에서 근무합니다. 그 곳엔 “도시의 도서관에 있던 곳과 완전히 똑같은 - 혹은 똑같다고밖에 볼 수 없는 - 난로“가 있습니다. 근처 오래된 사과나무를 베어서 장작으로 쓰는데 태우면 향긋한 사과 향이 납니다. 1부에 그려지는 도시 외곽에도 사과나무 숲이 펼쳐져 있으며 ‘나’는 소녀가 만든 약초차와 사과 과자를 맛봅니다. (1부 18장 164면)
발터 벤야민의 산문집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겨울날 아침」 글이 있습니다. 보모가 사과를 난로 속에 넣고 구울 때 어린 벤야민이 바라본 장면이 감각적인 이미지로 표현된 대목 일부 옮겨봅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향기가 새어나오는 방보다 더 고적하고 더 깊숙한 겨울철의 나의 밀실로부터 사과거품의 향기가 새어나올 때까지, 그러자 거무스름한 빛의 따뜻한 사과가 마치 여행에서 돌아온 지인(知人)처럼 친숙하지만 변모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여행은 난로의 열기로 채워진 컴컴한 나라의 여행이었다. 여행에서 사과는 하루가 나를 위해 준비한 모든 사물로부터 향기를 다 빨아들였다.“ (길 출판사 59면)
벤야민의 사과 향기가 그윽한 난로가 그렇듯 하루키의 사과 장작나무가 타는 난로와 반 지하 방은 1부 도시 도서관에서 소녀와 함께 한 지난날을 자극하는 환기력이 있지 않을까요.
같은 책에 소개된 벤야민의 ⸀오락서적」에도 눈 내리는 겨울날이면 반드시 떠오르는 글귀가 있습니다.
”눈이 내릴 때 먼 곳은 더 이상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104면) 눈 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책읽기에 몰두한 벤야민의 내면에 흐르는 감상입니다. 의식의 흐름처럼 전개되지요.
고야쓰와의 대화에서 고야쓰가 성경 ⸀시편」에 나오는 한 구절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38장 358면)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Man is like a breath; his days are like a passing shadow.)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5막 5장에 맥베스의 독백이 흐르는 장면에도 이와 비슷한 대사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뿐.“ (Life’s but a walking shadow.)
고야쓰는 그림자가 없는 유령에 지나지 않지만 삶의 연륜과 혜안이 깃든 메시지를 던집니다.
셰익스피어도 맥베스를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닫게 합니다. 삶과 죽음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도 끊지 못하는 햄릿의 독백도 떠오릅니다. 죽음 후에 남는 건 무(無)라고 하루키는 고야쓰를 통해 정직하게 말합니다. 한편 의식 밑바닥에 흐르는 우리 마음이 어딜 향하는가가 드러나는 의지보다 더 기민하게 우리 삶과 죽음을 좌우한다는 것도 넌지시 건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그림자’가 계속 나옵니다. 고야쓰는 본체와 그림자가 표리일체라 하며 상황에 따라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452면) 이쯤이면 그림자란 현실세계의 눈에 보이는 그림자뿐 아니라 1부 도시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그들 사이 경계 자체가 무너집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나누는 벽이 불확실한 것처럼. 그림자가 허상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 있는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