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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을 수 없기에 믿음직한 화자 (소설반 22.10.4)    
글쓴이 : 김성은    22-10-07 20:29    조회 : 3,675

가을비가 내렸던 개천절 연휴를 보내고 반갑게 소설반 문우들을 만났습니다. 개인사정이 있는 두 분을 빼고 출석하셨고요. 배움의 열정이 가득한 선생님들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5주차 수업에서는 소설의 다중화자 유형을 살펴보았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

1) 검비위사에게 대답한 나무꾼의 이야기

2) 검비위사에게 대답한 유랑 승려의 이야기

3) 검비위사에게 대답한 방면의 이야기

4) 검비위사에게 대답한 노파의 이야기

5) 다조마루의 자백

6) 기요미즈데라에 온 여자의 참회

7) 무녀의 입을 빌린 혼백의 이야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덤불 속」에서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의 현대적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여러 화자가 있고 화자는 소설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 그 살인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진술한다. 이를 통해 진실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가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표상하고 있는 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100년도 더 전에 이런 작품이 쓰였다는 게 아주 놀랍다. 

우리한테 익숙한 추리 형식의 서사들이 있는데 「덤불 속」은 그런 고전적인 추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그것과는 아주 무관한 의미를 획득했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한다. 

"믿을 수 없기에 믿음직한 화자"

신뢰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화자는 믿을 수 있는 화자와 믿을 수 없는 화자로 구분할 수 있다. 보통 믿을 수 있는 화자를 따로 규정하지는 않는데, 믿을 수 없는 화자가 어떤지를 규정하면 자연스럽게 개념화할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용어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해서 이 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혹은 「치숙」을 떠올린다. 상식처럼 통용되는 이러한 관점은 믿을 수 없는 화자가 지닌 풍부한 가능성을 이해하고 실현하는 걸 가로막기도 한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불필요하고 해로운 고정관념을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어리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태도는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이들은 어수룩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성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태를 오판하거나 오해할 수 있고 어른들 역시 편견에 사로잡히기 일쑤이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비록 경험이 적고 나이가 어릴지라도 사태의 본질을 누구보다 정확히 감지할 뿐만 아니라 진심과 진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으레 이런 작품을 예로 들어 믿을 수 없는 화자를 설명하려는 태도는 어리거나 미성숙한 화자는 진실을 알아볼 수 없다는 식의 관념을 은연중에 유포한다는 점에서 고정관념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덤불 속」의 플롯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추리 소설과 닮았다. 이 소설은 누군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린 뒤 주변 인물의 진술을 통해 전반적인 배경을 보여주고 핵심 인물들의 진술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들은 처벌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신이 죽였다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이것만으로도 특이한데 정말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고백이 계속될수록 사건의 진상은 미궁에 빠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서투른 작가라면 이것이야말로 독자를 교묘하게 속이는 장치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는 거다.

죽은 사내, 살해당한 사내, 도둑과 아내가 자신들이 죽였다고 주장하는 이 사내가 자신을 죽인 건 도둑이나 아내가 아니라고 진술할 때 손에 잡힐 듯했던 사건의 진상은 우리의 손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지면서 우리가 익숙했던 플롯에서도 아득하게 멀어지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작가가 독자를 속이려는 시도를 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주장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소설의 공통점은 어쨌든 진상이 밝혀지고 진범이 밝혀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덤불 속」은 추리 소설의 한 원형이다. 세 화자가 각기 다른 진술을 하지만 독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 한 사람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 화자가 가운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는 화자이고 한 사람은 믿을 수 있는 화자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이렇게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세 화자 가운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노라고. 셋 다 믿을 수 없는 화자라고.

그러므로 독자가 마지막까지 믿을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화자이고 믿을 수 없는 화자이기에 절대적 진리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증언하는 믿음직한 화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