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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적 엄숙주의 (소설반)    
글쓴이 : 김성은    22-09-17 09:17    조회 : 3,346

추석 명절 다음 날인 2주차 수업에는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았을 터인데 열아홉 분 중 한 분만 제외하고 모두 출석해 주셨습니다. 가을학기 역시 시작이 아주 좋습니다.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지난 시간에 수강생들이 소설쓰기의 두려움을 토로한 것에 관하여 작가님은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소설 쓰기를 50년 한 사람이라고 해서 소설을 수월하게 쓸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죠. 처음 쓰는 사람이나 기성작가나 똑같답니다. 매번 쓸 때마다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불안해하고 항상 그럴 수밖에 없다고요. 만약 내가 스스로를 잘 모르겠다 혹은 알면 알수록 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연한 거라고 하세요. 작가님도 매번 소설 쓰려고 앉으면 이전까지 소설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안 나고, 자신이 소설 쓰는 방법을 알기는 하나 늘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간신히 견디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고요. 그렇기에 나만 그런가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소설반 수업에서 얻는 가장 큰 이점은 바로 동료! ‘나만 외롭고 쓸쓸하고 힘든 게 아니구나’ 다 소설 쓰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구나를 매번 확인하면서 용기를 새롭게 내는 것이랍니다.

 

■ 로베르토 볼라뇨 「센시니」

: 지난 여름학기 마지막 수업에 이어 개인적 체험의 소설화를 다룬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을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문학적 엄숙주의에서 새로운 방식의 엄숙주의로의 이행

소설 자체를 대상으로 삼은 소설이자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은 글쓰기를 메타적 글쓰기라고 한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글쓰기 자체를 다루고 싶은 욕망이나 충동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또한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인간인 나를 드러내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자신을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쓰는 것이고 내 작업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보니 의식의 과잉이 아주 보편적일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 쓰기에 뭔가 자신을 보증해 줘야 된다는 생각 탓에 일종의 엄숙주의로 흘러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센시니」는 명백하게 메타픽션인데도 불구하고 소설에 대한 과잉된 의미 부여라든지 말 그대로 소설을 추앙한다는 식의 그런 어떤 접근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베르나르 키리니이 소설에서 인용한 문장처럼 문학 혹은 예술은 뭔가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이런 식의 관념들이 있다. 이 작품에선 그런 관념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  문학계에 부여되었다고 믿거나 여겨지는 어떤 기본적인 가치라든지 혹은 그것의 진정한 가치 이런 것들을 직접적으로 모색하거나 그것들을 다루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형적으로 소설 쓰기와 소설과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적나라하고 현실적이며 세속적이라고 할 만큼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더 세속적인 무엇인가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이런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고 참고할 수 있는 그런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나 의미상으로 보면 엄숙주의를 파괴했다기보다는 다른 형태의 엄숙주의를 실현했다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소설을 읽고 표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소설 쓰기가 무의미하다거나 무가치하다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이런 느낌을 받았다면 모르겠으나, 센시니라는 인물이 공모전에 집착했다는 뜻은 결국 공모전에 내려면 또 열심히 소설을 써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적 엄숙주의를 파괴한 것처럼 보임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문학적 엄숙주의를 실현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야 되고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되지 좋은 걸 싫다고 하거나 싫은 걸 좋다고 말하거나 하는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를 일반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표현된 것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센시니」 같은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

소설 쓰기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속되고 가치 없는 것이며 그것이 전혀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하지도 못하고 구원할 수도 없다는 처절한 인식을 다루었다고 해서 작가가 소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설을 사랑한다고 하면 소설을 사랑한다고 써야 되는 줄 안다. 바로 이 불일치를 견디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용기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자기 스스로를 믿어야 되고 독자 역시 그것을 그것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불일치를 먼저 작가가 견디지 못한다면 독자한테도 그것을 견뎌달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그걸 먼저 견뎌낼 수 있어야 되는 사람들이다. 우리한테 익숙한 무엇인가를 새롭고 낯설게 체험함으로써 그것의 의미를 독자가 스스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도록 제시해 줄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센시니는 소설을 쓰는 동안만은 진실했다라고 하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