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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로만 책을 쓴 남자 (소설반 22.9.22)    
글쓴이 : 김성은    22-09-22 20:32    조회 : 3,571

상쾌한 바람이 불고 청명한 가을날, 3주차 소설반 수업에 가는 길은 그 어떤 날보다 설레었습니다. 이날은 모처럼 수업 후에 뒤풀이가 예정되어서 더 그랬나 봅니다. 개인적 사정으로 못 오신 두 분을 제외하고 모두 출석해 주셨어요. 작가님은 물론 선생님들의 열의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르네요. 감사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머리로만 책을 쓴 남자」

*누구를 위한 글쓰기인가

에버렛 테일러 치버는 종이가 아닌 머릿속에 책을 썼다. 그는 예순두 살에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소설 열네 권을 써서 127명의 인물들을 만들어 냈으며 적어도 자신은 그 모든 인물들을 또렷이 기억했다.

오전 10시 15분에 그는 갑작스럽게 권태를, 몸이 마비될 듯한 숨 막히는 권태를 느꼈다.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 있는데 굳이 종이에 옮길 필요가 있을까? 앞으로 몇 주 동안 타자기를 두드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292페이지나(그 정도 분량으로 예상했다) 칠 생각을 하니 지긋지긋했다. 치버는 녹색 소파에 벌렁 누워 11시까지 잤다. 깨어 보니 기분도 상쾌해졌고 생각도 달라졌다. 이 작품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냥 완성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듬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니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도 되지 않겠는가?

에버렛도 듣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준비된 연설문을 낭독하는 듯했다. 추도연설문인 모양이었다.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공경을 받는 작은 구역에……쿵!……조심하시오!” 에버렛은 갑자기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꺾었다. “자신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묻고 있어요!” “에버렛! 조용히 해라!” 어머니가 말했다. “하하하!” 에버렛은 긴장이 웃음으로 폭발한 나머지 비틀거리며 나가서 복도의 벤치에 쓰러져 입을 꼭 다물고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로부터 팔 년 후 루이스는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에버렛은 체인 워크에 있는 부모의 집 침실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다.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생전에 마땅히 누렸어야 할 명성과 존경을 누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돌아가신 후에야……. 에버렛, 네 아버지께선 문인 구역에 묻혀 계시다. 그걸 잊지 말고…….” “예.” 에버렛은 왠지 가슴이 뭉클했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느끼기까지 했다. “물론 거긴 안사람의 자리는 없지. 네 아버지 곁에 묻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루이스가 속삭였다.

이 소설은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인가 이 문제를 이제 제기하고 있다. 다독, 다작, 다상량을 설명할 때 말했듯이 쓰는 순간 읽기 때문에 내 글의 최초의 독자는 나 자신이다. 작가한테는 누구를 위해 쓰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머리로만 썼기 때문에 이 작가는 남들과는 공유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야라고 그런 관점에서 보지 말아야 한다. 일단 머리로 쓰든 책으로 쓰든지 간에 무언가를 쓰는 행위 자체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글이다. 오히려 어떤 의미로 봤을 때는 책으로 썼는데 한 권도 안 팔린 작가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글을 쓰다 보면 항상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쓰는 것이고 내가 왜 글을 쓰는 것인 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제들(판매량, 명성)에 내가 잠식당하면서 나 자신을 힘들어지게 한다. 이 소설가가 머리로만 책을 썼다할지라도 어떤 점에서 보자면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한결 같은 작가로 살아온 사람이다. 책을 어느 출판사에 내고 싶다. 얼마나 팔리고 싶다. 이런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웠다. 오로지 쓰는 것 자체에 만족했던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머리로만 책을 쓴 사람이야말로 사실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실현하고 싶은 그런 경지 혹은 글쓰기의 기원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글 쓰다가 힘들어질 때마다 머리로만 한 평생 머리로만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일 수 있었던 사람에 대한 관점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으면 좋겠다.

“저는 항상 그렇게 스스로를 좀 다독이면서 나 자신이 작가임을 잃지 않고 살려고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_손홍규